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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라는 사치
편집장 ㅣ 기사 승인 2017-05-21 13  |  588호 ㅣ 조회수 : 36
기자는 바둑을 뒀다. 일고여덟 살 무렵부터 두기 시작했으니 햇수로 십삼 년쯤 된 셈이다. 도장에서 공부하며 준 연구생 수준의 공부를 한 적도 있었고, 덕분에 어디에서든 크게 부족하지 않은 기력을 갖추게 됐다. 도장을 그만두며 바둑을 업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접었고, 대신 기자는 남부럽지 않은 취미 하나를 얻게 됐다.

바둑은 취미로 제격이다. 온라인 대국을 이용한다면 딱히 지출이 발생하지도 않고, 게임하는 동안 상당히 많은 걸 배울 수 있으며, 신선놀음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다. 정신없이 바둑을 두다 순식간에 한나절이 지나가 버린 적도 종종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한 판에 몇 시간씩 둘 수 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른 많은 취미들이 크게 다르겠느냐마는, 앞서 얘기한 특성상 바둑을 취미로 즐기려면 여유가 필요하다. 아무리 속기로 둬도 한 판에 이삼십 분은 필요하고, 도발이라도 당하며 패했을 땐 이러고는 못 나간다는 생각에 몇 판씩 재대국을 이어 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는 바둑 두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비교적 할 일이 없었던(?) 새내기 때엔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바둑 두는 시간을 따로 가졌으나, 학년이 높아지고 맡아 해야 하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바둑이든 뭐든 취미 생활에 시간을 쏟을 여력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바둑 두는 시간이 일종의 ‘사치’가 된 셈이었다.



기자는 얼마 전에야 그걸 자각했다.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취미 생활에 쓰는 시간이 사치로 느껴진다는 건. 사치는 사전적으로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이라고 정의돼 있다. 취미가 사치가 될 정도로 팍팍하고 빠듯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기자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사실 이런 생각을 기자만 갖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사회가 그렇고, 특히 우리 청년 세대가 그렇다. 여유롭게 취미를 즐기고 있자니 주변 사람들은 스펙을 쌓느니 자격증을 하나라도 더 따느니 하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 같다. 게다가 애초에 취미를 즐길 시간 자체가 부족하기도 하다. 학점 관리에 알바에 대외활동에 드는 막대한 시간을 빼고 나면 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을 거다.



그런 현실을 잘 알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가끔은 취미도 즐기고 쉬어야 한다느니, 어디 가서 내놓을 만한 취미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다(기자부터도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날 테니까). 취미가 사치가 돼 버린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사치를 부리다 생존 경쟁에서 뒤처지는 일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취미가 있는 삶, 말은 참 아름답고 이상적이지만, 취미도 결국 돈과 시간이 받쳐 줘야 가능한 거니까.



이러고 보면 푸념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기자에게는 마땅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고, 그래서 이렇게 푸념이라도 늘어놓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누군가 뛰쳐나와 번쩍 빛나는 묘안을 던져 준다면 참 좋으련만!). 그저 어서 이 팍팍한 사회가 좀 더 여유로워지고, 그래서 기자 뒤의 세대에게는 취미가 더 이상 사치가 아닌 삶이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아, 좀 더 빨리 찾아와 기자도 그런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면 금상첨화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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