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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초점렌즈와 비움
권혁동 ㅣ 기사 승인 2017-05-21 13  |  588호 ㅣ 조회수 : 110


권혁동 교수(MSDE전공)


비 오는 봄날 오후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꾸물거리고 어둠이 금방 몰려올 기세였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강의를 위해 교탁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파일을 준비했다. 큰 문제 없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방긋 웃으며 출석을 부르려 했다. 출석부의 글자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썼다. 갑자기 잘 보이지 않았다. 읽는 데 문제가 있어 헤매고 있는 것임을 다들 눈치 챌 정도였다. 안경을 벗고서 인상을 찌푸리자 간신히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머릿속에 찬바람이 쌩하고 지나갔다. ‘내가 어디 아픈 것인가? 건강에는 자신 있는데. 며칠 동안 과로했나?’ 순간적으로 반성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안이 심각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다. 해놓은 것도 별로 없는데, 벌써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니 실망이 컸다. 눈이 미웠다. 괴로웠다. 짜증이 많아졌다.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침침해진 눈으로 사무실 이사를 하게 됐다. 낡은 것을 정리했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았던 책·물건을 버렸다. 과감히 매정하게 버렸다. 그동안 정들었던 사연과 추억도 함께 버렸다. 사라진 책장의 빈칸처럼 마음도 허전하다. 서가의 층층마다 듬성듬성한 자리에 기념패·장식품을 놓아 가렸다.



앞으로는 책은 머리에 쏙 집어넣어야겠다. 기억에 두지 못하고, 보관하는 것은 공간의 낭비다. 정년이 되는 날 모두 버릴 거다. 그때까지 성취 못 한 나의 족적을 사악 지워버릴 거다. 비워진 서가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욕심·의심·상념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대학을 졸업한 딸에게 말했다. “내가 많이 늙어 정신 없어지면, 아빠를 대신해 판단하고 정리해주라. 네가 불혹의 나이가 되면 인생에 대해 알겠지. 너의 모든 결정에 이의 없이 따르마. 그 전에는 아버지의 길과 방향에 박수를 쳐다오. 그리고 이유 없이 지지해주라. 무조건 성원해주라.”



동료와 한잔하면서 얼큰한 힘을 빌려 부족한 시력을 주저 끝에 고백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다. 동료는 “뭘 걱정하냐?”고 하며 답을 줬다. 다초점 안경을 해보라는 것이다. 적응되면 괜찮다고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폼 빠지는 두툼한 안경이 될까 하여 걱정을 하면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안경을 맞췄다. 우울한 느낌을 알아챘는지 안경점 주인은 노안이 좀 늦게 왔다고 구슬리면서 안심시켰다. 다시 글자도 세상도 잘 보이기 시작했다. 편해졌다. 해프닝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이건 진짜가 아니다. 욕심도 분노도 줄이라는 자연의 명령이다. 늙어감을 잘 관리하라는 시그널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신체 기능이 저하되는 건 막을 수도 없고 자연스럽다. 기술로 일부 기능은 보완되기에 도구를 잘 쓰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새 다초점 안경을 쓰고 ‘내 눈 정말 괜찮아요’라고는 우기지 않으리라. 지금부터는 이기려는 마음을 내세우기보다 접어주면서 살아 보련다. 집착과 미움을 내려놓고, 욕심과 욕망도 버리는 연습을 하겠다. 시간과 함께 인생이 잘 익어가도록 애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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