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소개 l 공지사항 l PDF서비스 l 호별기사 l 로그인
잘못된 공감
고태영 ㅣ 기사 승인 2019-10-20 15  |  623호 ㅣ 조회수 : 145



고태영 기자

(안전·13)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학살자 아이히만은 1961년 재판에서 “스스로 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러나 나는 국가에 충성해 국가가 시킨 일을 그대로 완수한 것일 뿐이므로 법적으로는 무죄이다”라고 자신을 대변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표현했다. 악인은 흔히 생각하는 인격파탄자나 사이코패스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사람도 악마가 되는 것이다.



  영화 〈조커〉를 보고난 사람들은 악인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커는 행복하게 살고 싶은 광대였다. 그리고 타인을 즐겁게 만들고 싶은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하철 사건 이후로 그는 더이상 웃고 싶지 않을 때는 웃지 않는다. 그를 죄어오는 무례한 사회는 광인을 만들기 충분했다. 관객들은 아서 플랙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단 한 곳도 기댈 곳 없는 그에게 다가온 수많은 충격을 자신이 겪는다면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왜 그에게 공감했을까?



  첫째로는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불우한 가정환경, 정신병 그리고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을 아서의 눈으로 본다. 정확히는 왜 아서가 살인을 하는지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버스에서 만난 흑인 여성, 머레이의 쇼 방식, 어머니의 삶, 동료 광대, 취객 등 그 누구의 평소의 삶이나 모습은 볼 수 없다. 가령 버스에서 만난 흑인여성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관객들은 그녀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위해 남편과 이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정신적인 고통에 남성에 대한 공포증마저 생겼다. 그러던 도중 버스에서 만난 낯선 남자는 그녀의 아기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게 불쾌함을 표했지만, 낯선 남자는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너무나도 불쾌한 그때 그 남자는 자신이 병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를 믿을 수도 없다. 그저 기분이 너무나도 불쾌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일축한다면 너무나도 간단하다. 흑인 여성은 아이를 즐겁게하는 남자에게 무례했다. 조커의 이야기도 일축할 수 있다. 조커는 자신에게 무례한 사람을 죽였다. 결국, 구구절절 기나긴 스토리는 조커의 변명이 됐다. 우리가 사회에서 보는 대부분의 범죄자는 불우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삶을 모르기 때문에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바로 아렌트가 경계한 악의 평범성이다. 여기서 평범이란 것은 겉으로 보기에 보통인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으로 일반화했을 뿐 부자도 권력가도 장사도 그 어떤 사람도 행동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 악인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영화 속에서 조커를 동정하며 옹호하게 된 것은 그가 우연하게도 가난했고, 소외됐고, 신체적으로 약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무나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악이 되는 과정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아서의 모욕과 살인의 일치하는 방식은 그의 공감 능력 결여에서 기인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었고 자신 역시 행복해지고 싶었다. 어머니 역시 그에게 HAPPY를 강요했다. 그리고 행복은 웃음을 통해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한 것 즉, 웃긴 것이 뭔지 모른다. 농담 노트에 적힌 그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농담과 웃음의 포인트는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정신적인 상담을 진행하던 상담원도, 병원의 아이도, 스탠딩 코미디와 머래이 쇼의 관객도 단 한 명도 웃기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여러 코미디쇼에서 공부한 웃음 포인트 중 하나인 ‘야한 개그는 어디서든 통한다’는 금지됐다. 그가 생각하는 유머는 이미 대중적인 쇼에서 금지당했다. 웃기지 않는 코미디언이 자신이 코미디언이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그리고 그 모순이 관객에게 웃음을 일으킨다는 포인트에서 아서의 결점은 확연히 증명된다. 이러한 공감 능력 결여는 자신에게 부여된 행복해야 한다는 억압이 깨지자 범죄로 나타났다. 자신의 불쾌는 곧 죽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인과관계의 모순이다. 그가 죽이는 사람들이 모두 무례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의 범죄는 무언가 척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도한 권선징악이라는 성격을 가진다고 느끼게 하는 그의 살인은 원인부터 모순이다. 무례 = 살인이라는 과도한 처벌은 통쾌함이라 치더라도, 그는 애초에 무례를 판별할 능력도 없었다. 끊임없이 망상 속에 빠지는 그가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망상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익히 들어본 악을 벌한다는 프레임은 그가 빌런이 아닌 빈민을 대표하는 조금 통쾌한 히어로라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올바른 것과 오류의 뒤섞임은 관객에게 혼란을 준다.



  〈조커〉는 마치 악인의 탄생이 인간 본인의 문제가 아닌 환경의 문제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들도 이 사회가 천국이 아닌 이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역경과 고난이라는 벗어난 위인들은 너무나도 많다. 위인이 아니더라도 역경을 벗어난 평범한 사람들은 넘처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범죄는 없다. 그럴 수도 있다는 범죄도 없다. 다만, 우리들은 깊게 생각하지 못하면 흔들리는 함정에 빠질 뿐이다.


기사 댓글 0개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쓰기 I 통합정보시스템, 구글, 네이버, 페이스북으로 로그인 하여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확인
욕설,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01811] 서울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 최초발행일 1963.11.25 I 발행인: 김종호 I 편집장: 김선웅
Copyright (c) 2016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