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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없어 아쉽지만
기사 승인 2020-09-14 01  |  634호 ㅣ 조회수 : 16

  2020년 1월 23일 인구 천만의 도시가 봉쇄되었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회색 하늘과 고층 빌딩 사이 텅 빈 고가도로는 마치 암울한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초현실적 풍광이 자아내는 공포, 두려운 상상은 결국 우리 앞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전세계적 감염병 코로나-19에 대해 우리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원인균이 어디에서 왔는지와는 별개로 이 감염병이 어디에서 집단적으로 발병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중국 중부에 위치한 대도시 무한(武漢, 현지 발음 ‘우한’)이다.



  도시의 봉쇄가 시작되면서 SNS를 통해 알려진 무한 시민들의 봉성일기(封城日記)는 외신을 통해 알려진 현지 의료계의 열악한 상황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담으려 애쓰고 있었다. 자신의 차로 간호사나 의사의 출퇴근을 돕는 시민들,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호텔을 개방한 사장님 등 따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반면 펜데믹을 책임지라는 국제사회의 비난은 거세졌고 외신 기자의 카메라는 무한의 한 수산물유통시장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 세계인의 눈에는 비위생적인 시장 환경이 그대로 노출되었고 무한의 평판은 그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만약 이를 기회로 무한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화남해산물시장과 코로나-19만으로 무한을 기억한다면 그 또한 슬프고도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양자강으로 흘러드는 수많은 지류가 있지만 그 중 한강(漢江)의 역사적 의미는 크다.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한강과 우연히 한자 표기는 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양자강에서 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황하 유역의 중앙부에 이르게 되니 황하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일찍이 이곳을 통과했다. 한강의 입구, 한구(漢口)라는 무한의 옛 지명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977년 주나라 소왕(昭王)이 한강을 따라 남하하여 초나라를 공략했다. 뜻밖에도 군선은 침몰했고 소왕은 수장되었다. 이 충격으로 주나라는 이후 양자강으로 세력을 확대하지 않았고 그 틈을 타 초나라는 양자강 남북에 걸쳐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훗날 한고조 유방에 대적했던 항우의 나라 초(楚)였다.



  “나는 차라리 상강(湘江)에 뛰어 들어 강의 물고기 뱃속에 나를 장사지내겠습니다. 어떻게 결백하고 고결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습니까?” 초의 문학을 대표하는 굴원(屈原)의 유언이다. 초의 붕괴와 함께 중국 역사상 정치의 주도권은 황하 유역으로 집중되었다. 그렇다고 무한 지역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의 시대 손권과 유비, 조조가 격돌했던 적벽대전의 무대였고, 양자강의 수운을 장악하려는 치열한 경쟁 속에 황학루(黃鶴樓)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호령할 정치권력은 결국 양자강 유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양자강과 여러 지류가 만들어 낸 비옥한 충적토는 이미 6천 년 이상 이 지역을 문명의 요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특히 명나라 중기부터는 호광숙 천하족(湖廣熟 天下足)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했는데 여기에서 호광은 무한이 포함된 호북성과 양자강 남쪽 호남성의 통칭이다. 호광지역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대두되면서 이 지역의 농업 생산이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한구의 미곡 상인들은 전국의 쌀값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세력을 키워갔는데 때로는 작황이 나빠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호광에 풍년이 들어도 쌀값이 상승하는 악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청나라 말기 중국이 서양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자 광동성의 광주, 강소성의 상해, 하북성 천진 등이 차례로 개항했다. 그러나 진정 외국 상인들이 진출하고자 갈망했던 곳은 호북성 한구, 즉 오늘날 무한이었다.



  15세기부터 확고해진 농업생산력과 물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면서 무한은 성장해 갔다. 명청시대 호북성 한구는 수륙 교통의 요충으로 양자강을 따라 형성된 동서 수운과 내륙 각지를 연결하는 상업 교통망의 요충이 되었다. 이 때 소주, 항주, 남경 등 전통적인 상업 중심지는 물론 광동성 불산(佛山), 하남성 주선(朱仙), 강서성 경덕진과 함께 4대 상업도시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외국 상인들이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극히 우려했던 청나라 정부도 결국 제2차 아편전쟁에 패배함으로써 한구의 개항을 허락했고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정부가 치외법권을 행사하는 한구 조계(租界)가 등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무한의 성장을 문호개방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1907년까지 17년에 걸쳐 호광총독을 지낸 장지동은 서양의 철강, 군수 산업을 무한 일대에 적극 유치했고, 북경에서 한구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에 매진하였다. 신식 교육에도 힘써 1893년 그가 세운 자강학당(自强學堂)은 오늘날 무한대학(1928년 개명)으로 발전했다. 마지막 봉건왕조 청나라의 와해를 불러온 무창봉기, 신해혁명의 토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대학의 역량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현재 무한대학은 QS 세계대학순위 250위, 중국 국내 5위 전후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연면히 이어온 전통 위에 경신(更新)이 가능함을 실감한다.



  올해 연초 세계 각지의 교민을 국내로 수송하느라 긴장했던 때가 기억난다. 무한에 대해서는 모두 세 차례나 전세기를 투입하여 천 명에 가까운 교민을 수송했다. 그제서야 알았지만 무한은 중국 전역에서 채 10개도 되지 않는 우리 외교부의 총영사관이 설치된 도시이다. 지금도 감염병의 공식 명칭과는 무관하게 인터넷에서 ‘우한(무한) 코로나’는 쉽게 검색된다. 그러나 감염병을 수식하는 말로만 무한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그 이름을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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