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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그래피티는 처음이지
박수영 ㅣ 기사 승인 2017-03-19 17  |  584호 ㅣ 조회수 : 472

  길거리에서 그래피티를 마주했다. 불쾌한가, 아니면 예술이라 느껴지는가? 과거에 그래피티는 거리의 낙서로만 여겨졌지만, 이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에서 그래피티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래피티는 더 이상 낯설고 먼 창작물이 아니다. 대중예술의 한 분야로 당당히 자리 잡은 그래피티에 대해 알아보자.





▲ 1960년대 말 뉴욕 브롱크스에 그려진 ‘TAKI183’낙서를 추적한 뉴욕타임즈




▲ 독재정권에 맞서 그려진 이집트 카이로의 그래피티




▲그래피티 뮤지엄쇼에 전시된 제우스의 작품들




▲ 본인의 작품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


 





  그래피티(Graffiti)는 벽이나 그 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이다. 그래피티는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와 그리스어 ‘sgraffito’에서 유래한 말로 ‘spraycan art’, ‘aerosol art’라고도 불린다. 프랑스에서는 그래피티를 ‘거리미술(street art)’, ‘도시미술(art urbain)’로 부른다.



  그래피티의 기원은 기원전 1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피티의 기원은 고대 동굴벽화, 이집트의 벽화 등 낙서에 가까운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낙서로 자신들의 일상을 기록하거나 감정을 표현했다. 즉, 그래피티는 인간의 감정표현과 의사소통 수단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다. 그래피티가 예술로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인 사이 톰블리와 잭슨 폴록이 그림과 낙서를 결합하는 독창적인 표현 양식을 선보였고, 장 뒤비페 또한 낙서의 재해석을 통해 그래피티를 발전시켰다.



  현대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갱스터들의 문화에서 시작됐다. 당시 미국 갱스터들은 벽에 낙서를 남기며 영역을 표시하는 관습이 있었다. 갱스터들로 시작한 현대 그래피티는 미국의 소외계층까지 퍼졌다. 1960년대 말 미국 브롱크스에서는 벽마다 ‘TAKI183’이라는 낙서가 적히기 시작했다. 뉴욕시민들이 낙서의 의미를 궁금해 했고, 뉴욕 타임즈는 낙서를 남긴 사람을 추적했다. 범인은 가난한 그리스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애칭인 TAKI와 자신이 사는 집이 있는 183번가의 번호를 더해 ‘TAKI183’이라고 벽에 남서를 남겼다. 이후 비슷한 행위가 뉴욕 브롱크스 거리에 이어졌다. 이는 현대 그래피티의 시초가 됐다. 현대 그래피티의 초기는 반항적 청소년, 흑인, 소수민족들이 주도했고 이들은 뉴욕 브롱크스 거리에 자신의 이름 또는 별명을 남기며 낙서를 가득 채웠다.



  그래피티가 거리의 낙서에서 예술의 한 분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장 미셀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이 있다. ‘검은 피카소’라고 불리는 바스키아는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이 없다. 바스키아는 낙서그룹 ‘SAMO’를 조직해 그래피티를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스프레이를 이용해 시적인 글과 낙서 같은 그림을 상징으로 남겼다. 그는 주로 흑인 영웅,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을 주제로 충격적인 작품을 남기며 낙서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 해링은 아이콘화된 사물을 그리는 그래피티로 유명하다. 해링은 더러운 뉴욕의 지하철에서 더 나아가 세계의 도시의 벽에 상징적인 형상을 그렸다. 해링은 검은 종이 위에 흰 분필로 그림을 그리며 인종차별 반대, 에이즈 퇴치 등 사회적인 메시지를 그림에 담았다. 해링의 작품은 티셔츠, 벽화, 공익광고 등으로 제작돼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그래피티가 처음부터 예술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피티는 반달리즘*에서 출발한 문화다. 그래피티는 기본적으로 남의 권리를 침해하며 시설을 파괴하는 불법 행위였다. 초기의 현대 그래피티는 공공기관을 훼손하고 자신의 흔적, 영역을 남기는 행위가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이 그래피티를 그린 장소가 지하철, 공공장소와 같은 시민 모두의 재산인 경우가 많았다. 당시 그래피티는 도시의 경관을 해치고 공공기물을 파손할 우려가 있으며, 사회 반항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사회 문제로 인식됐다. 1980년대 뉴욕의 지하철과 길거리는 스프레이 낙서로 가득 찼고 유리창들은 마구 깨졌다. 그래피티로 인한 혼란스러운 풍경과 무서운 분위기가 더해져 뉴욕의 범죄율은 날로 높아져 갔다.



  1995년 뉴욕 시장으로 취임한 루디 줄리아나는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 그래피티를 철거했다.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발표한 ‘깨진 유리창 이론’에 근거한 대책이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 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줄리아나는 CCTV를 뉴욕 곳곳에 설치해 그래피티를 단속했고 뉴욕의 범죄율이 차츰 낮아졌다.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그래피티의 인기는 더 높아져 갔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리의 그래피티는 뉴미디어로서 주목을 받았다. 2011년 이집트에서는 30년 동안 무라바크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무바라크 정권은 수많은 인권침해 행위를 저질렀고, 이에 예술가들은 이집트 수도인 카이로 거리에 무바라크의 악행을 그래피티로 표현했다. 예술가들의 행위는 점점 인기를 얻었고, 화려한 벽화들이 카이로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후 그래피티는 독재정권에 맞서는 새로운 투쟁의 수단이 됐다. 결국 무바라크는 2012년 2월 대통력직에서 물러났다. 그래피티가 단순한 낙서를 넘어 독재와 맞서 싸우는 큰 힘이 된 것이다.



  그래피티를 예술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초기의 그래피티가 지금과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래피티는 초기에 반달리즘과 반항 정신이 강했다. 그러나 그래피티가 상업화·대중화되면서 처음의 성격이 옅어지고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해졌다. 오늘날 뉴욕 브롱크스에 가면 그래피티가 장난감 가게의 광고, 유치원 슬로건이나 아이스크림 차량 광고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피티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더 많은 대중들이 그래피티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중들이 거리감을 내려놓고 그래피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불법 행위로만 치부되던 그래피티의 위상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반달리즘 :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 넓게는 낙서나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공공시설의 외관이나 자연경관을 훼손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그래피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5년 6월 서울도시철도공사는 그래피티를 양지화하자는 목적으로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에 그래피티 전용관을 마련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의 재능기부로 높이 2.7m, 길이 51m 규모의 그래피티가 제작됐다. 녹사평역 그래피티는 2015년 8월 광복 70주년을 기념한 작품을 끝으로 완성됐다.



  그러나 몇 안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그래피티가 허가된 공간은 거의 없다. 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는 “우리나라에서 그래피티가 낙서나 불법 행위로 치부되고 있어 안타깝다”며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그래피티를 제대로 활용할 기회가 부족한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근 그래피티를 꿈꾸는 국내 예술가들이 우리나라의 좁은 입지 때문에 해외로 떠나고 있다. 심찬양 씨는 미국에서 흑인이 한복을 입은 그래피티를 그렸다. 그는 이 그래피티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LA의 컨테이너 야드로부터 그래피티를 그릴 수 있는 벽을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최근 국내 미술관이 그래피티를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2014년 7월 안산 경기도 미술관에서 ‘거리의 미술-그래피티 아트’ 전시가 열렸다.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그래피티 전시였다. 전시는 ▲한국인들을 위해 변형한 해외의 그래피티를 보여준 그래피티 존 ▲홍대와 압구정의 많은 그래피티와 메이킹 필름을 전시한 스트리트 존 ▲그래피티 관련 물품을 소개한 아카이브 존으로 구성됐다. 경기도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그래피티를 옮겨온 것이 아니라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미술관 벽에 직접 그린 것이다. 그래피티의 본질을 살리려는 노력이었다.



  지난해 12월 9일(금)부터 지난 12일(수)까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은 ‘그래피티 뮤지엄쇼: 위대한 낙서 展’을 진행했다. 이번 전시는 팝아트를 잇는 예술 장르로서 ‘낙서’를 재조명했다. 크래쉬, 닉워커, 쉐퍼드 페어리, 존원, 제우스, 라틀라스, 제이알 총 7명의 해외 유명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60여 작품이 전시됐다. 이번 전시를 관람한 박주연(서울시 도봉구) 씨는 “국내에서 그래피티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전시회에서 수준 높은 작품을 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사진도 찍을 수 있는 자유로운 전시회여서 더 좋았다”고 전했다. 한편 서예박물관 관계자는 “그래피티의 역사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을 선정했다”고 답했다.





본지는 지난 16일(목)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그래피티를 그린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본명 최성욱·39) 씨를 인천 동구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Q.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A.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라고 한다. 1998년부터 그래피티를 시작했다. 레오다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줄인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그래피티의 르네상스를 열어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Q. 그래피티를 시작한 계기가 있다면?

  A. 미대에 입학해서 힙합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벽이 아무것도 없고 휑하더라. 대학 선배들이 동아리 벽을 꾸미길 원했고 그때 처음으로 그래피티를 그렸다.

  Q. 지금까지의 활동을 알려 달라.

  A.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그래피티 작업을 했다. 2005년 바비킴과 부가킹즈가 출연한 하이트 맥주 광고에 내 그래피티가 나왔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래피티를 그렸다. 이후 부가킹즈 콘서트도 함께 작업했고, 이외에 가수 바다, 박정아, 신인가수 등 뮤직비디오에 많이 참여했다.

  Q. 녹사평역 그래피티 작업을 할 때 에피소드가 있다면?

  A. 왼쪽에 그린 인물 중 시인을 표현한 그래피티가 있다. 뉴스에도 나왔다. 뉴스를 보고 사람들이 박근혜 前 대통령을 그린 것으로 오해했다. 방송이 나간 후 악플이 많이 달렸다. 오른쪽에는 독립운동가 시리즈를 그렸는데 작품마다 세월호 리본을 추가로 그렸다. 몇 개월 후 누군가가 볼펜으로 노란 리본만 긁어놨다. 안타까웠다. 나중에 가서 다시 수정했다.

  Q. 가장 기억이 남는 작품을 꼽자면?

  A. 삼청동에 그린 유관순 그래피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2013년도에 독립운동가 시리즈를 시작하고 처음 그린 작품이다. 유관순 열사가 돌아가신 날을 기념해 9월 28일에 그렸다. 당시 허가를 받지 못해 새벽에 몰래 그렸다. 나중에 그림이 지워졌는데 사람들이 다시 그려달라고 블로그에 요청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서 매우 뿌듯했다.

  Q. 국내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는가?

  A. 국내산 그래피티 전용 스프레이가 없다. 스프레이가 다 수입 제품인 데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다. 공업용으로 쓰이는 국내 제품이 1,500~2,000원인데, 그래피티 전용 수입 제품은 12,500~18,000원으로 10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또, 그래피티를 그릴 공간이 한정돼 있다. 공간이 정해져 있으면 그래피티를 그리기 편할 텐데 정부에서 허가를 내준 공간이 거의 없다. 

  Q.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A. 그래피티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유럽처럼 그래피티가 스트리트 아트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개인적인 꿈은 청와대 벽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것이다. 특정 인물이 아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Q.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A. 허가를 받고 그리는 게 첫째지만, 어디서든 당당하게 그렸으면 좋겠다. 또, 무엇을 그리든 좋지만, 선을 하나 그리더라도 정성스럽게 자기 생각을 담아서 작품을 완성했으면 좋겠다. 처음에 자기 색깔을 꼭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디자인과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그래피티를 하고 있다. 그래피티를 하다보면 디자인처럼 다른 분야로 넘어갈 수 있는 발판도 생길 수 있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활동하길 바란다.



 



  박수영 기자

  sakai1967@seoul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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