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윤 (식공·18)
최근 타임슬립, 일명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인기다. 동시에 교통수단 안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감상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오랜 통학 시간 지루함을 달래고자 필자 또한 매일같이 음악을 듣곤 한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취미에 대한 기사를 보면 음악감상은 늘 1.2위를 다툰다. 그만큼 음악이 많은 이들의 일상 속에 가까이 녹아들어 있음을 뜻한다. 타임슬립과 음악,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최근 음악을 소재로 한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가져봤다. 나름 새로운 깨달음과 궁금증에 대한 해답도 많이 얻었던 음악 여행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현대 한국의 가요를 들여다보면 통용되는 공식이 하나 있다. 모든 곡이 사랑과 이별의 노랫말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짝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홀로 전하는 마음, 혹은 이별 후의 아픔과 그리움까지 모든 감정선이 사랑으로 귀결된다. 필자는 이 기현상에 의구심이 들었다. 노래란 운율이 있는 언어로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인데 어째서 현대 가요는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할까. 듣는 이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이 노래의 핵심이니 누구나 느껴봤을 법한 감정인 사랑을 활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의문을 풀고자 눈을 돌려 7~80년대의 한국 가요를 들어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사랑은 시대를 따지지 않고 삼을 수 있는 소재였다. 동시에 사랑뿐만 아니라 더 풍부한 감정을 노래했음을 발견했다. 다양한 포크 밴드들이 등장해 아름다운 노랫말로 우리네 인생사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신을 성찰하거나 젊음 혹은 자연물을 예찬하기도 했다. 현대의 가요와 비교하면 투박한 음색과 소소한 악기들이지만 느껴지는 마음의 울림은 더 컸다. 노래를 통해 위로받고 마음을 채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통기타 하나와 담백한 목소리만으로 오롯이 노래를 채우는 그 시절의 아날로그 감성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이 구시대적 노래가 가진 힘은 비단 풍부한 주제를 다룸에 그치지 않았다. 필자는 이들 사이에서 외국어 가사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글로만 쓰인 노랫말은 외국어 가사가 난무하는 최근의 가요와는 확연히 달랐다. 귀에 익은 모국어의 힘인지 가사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를 목소리를 매개로 잘 느낄 수 있었다.
한글의 위대함과 똑같은 외국어 단어를 두고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넓은 표현 범위는 미디어와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충분히 배웠다. 그간 체감하지는 못했는데 옛 노래들을 접하며 우리말을 활용한 놀라운 표현력과 예쁜 어감 등을 확인했다. 머릿속으로만 그러려니 하고 있던 ‘우리말의 표현법과 정서를 담는 능력은 훌륭하다’라는 명제가 참임이 증명됐다. 해당 시대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감동과 공감을 주니 노래가 가진 힘이 시대에 구애받지 않음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앞서 말한 현대 가요의 모습 탓에 최근 실망과 아쉬움을 많이 느끼던 터였다. 어느 곡을 들어봐도 철저히 자신의 입장에서만 대단한 사랑을 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룬 가사뿐이었다. 그뿐만이랴. 그저 멋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외국어 사용 능력을 홍보하고 싶은 허영인지 의도가 불분명한 외국어 가사가 난무했다. 온갖 기계음을 혼합한 반주에 사이보그 같은 가수의 목소리까지 총체적 난국에 금방 눈살이 찌푸려졌다.
기술적 측면에서 현대 가요가 발전했음은 분명 인정한다. 하지만 운율을 담은 언어로 듣는 이의 마음에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본질의 측면에서는 아쉽지만 후퇴했다는 느낌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자는 현대 가요에서 느끼던 갈증을 시대를 거슬러 반세기 전의 가요로부터 해갈했다.
옛 노래들을 촌스럽고 공감하기 힘든 낡은 감성의 전유물로 치부하는 일은 없기를 소망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포근한 위로를 줬다면 시대가 지났다고 한들 그 가치는 바래지 않았다는 뜻이니. 우리들의 감성을 채워주는 가장 가까운 예술로, 그리고 친구로 오래도록 함께하길 노래하며 짧은 음악 여행기를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