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사의 롤러코스터, 랍스터와 설탕
랍스터는 현재 ‘부의 상징’으로 불리는 고급요리다. 하지만 17세기 미국에서 랍스터는 그야말로 ‘가난의 상징’이었다. 미국 동부 해안에선 랍스터가 말 그대로 곳곳에 깔린 상황이었다. 너무 흔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랍스터를 밭의 비료로 썼고, 집게발은 잘라 낚싯바늘로 이용했을 정도다. 미국에 처음 이주했던 사람들은 곳곳에 널린 랍스터를 질리도록 먹었고, 이는 노동자들과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었을 때는 일종의 노동계약서에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랍스터를 주지 않는다’란 말을 쓸 정도로 랍스터는 빵보다 못한 싸구려 음식이었다.
랍스터의 환골탈태는 19세기에 와서야 이뤄졌다. 랍스터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법이 등장하면서 랍스터의 처지는 180도 바뀌었다. 미국 전역으로 랍스터가 수송되면서 랍스터는 고위층의 접대 음식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반면, 설탕은 랍스터와 반대의 길을 걸었다. 설탕은 한 나라의 왕이나 왕비도 쉽게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조선의 4대 왕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병이 났을 때 설탕을 먹고 싶어 했지만, 우리나라에 없어 먹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설탕이 지금처럼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이유는 15세기부터 시작된 플랜테이션 덕분이었다. 각지에서 흔하게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게 되자 설탕은 귀족의 음식에서 노동자의 음식으로 전락했다. 지금도, 빈곤층은 설탕 비율이 높은 인스턴트 음식이나 질이 낮은 식품을 주로 섭취한다. 설탕의 지위하락은 플랜테이션의 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전쟁이 탄생시킨 음료수 ‘환타’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비극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 속에서도 우리의 생활을 바꿀 것들이 탄생하기도 한다. 음식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즐겨 마시는 ‘환타’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일의 총통 히틀러는 여러 경제부양책을 추진했다. 해외의 공장을 독일로 유치하는 것도 경제부양책의 일환이었다. 코카콜라 공장도 이때 독일에 들어왔고, 코카콜라는 독일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히틀러 역시 코카콜라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과 독일이 적대국이 되면서, 독일의 코카콜라 직원은 재료와 설비를 가지고 모두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코카콜라를 잊을 수 없었던 히틀러는 독일만의 탄산음료를 만들기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환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렀을 땐, 환타를 만들 재료도 부족해졌다. 이 때문에 단맛을 내는 모든 재료를 그때그때 넣어 만들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다른 탄산음료에 비해 환타의 맛 종류가 다양해진 이유다.
우리가 무심코 먹는 음식 속에도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오늘은 식사하기 전에 먹는 음식에 대해 작은 호기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윤성민 기자 dbstjdals0409@seoul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