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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634호 시와산책
기사 승인 2020-09-14 01  |  634호 ㅣ 조회수 : 18

어떤 부활절



나희덕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마침내 가장 두려운 신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툭툭 쓰러지는 위력 때문에

인간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에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지적인 이 존재는

일찍이 영원불멸할 수 있는 비밀을 터득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버려야 해

우리가 포기한 것은 독립성,

대신 우리는 어떤 생물에도 깃들 수 있게 되었지

세상에 편재하게 되었지

억조창생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 거야

그들이 지나갔을 법한 길목마다

흰 텐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입을 벌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으며 중얼거린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무 일 없겠지



일제히 문을 닫은 예배당,

종일 검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재난방송을 설교보다

더 열심히 들으며 안식일을 보냈다



드라이브 쓰루로 고해성사,

자동차에 앉아 있는 동안 잠시 신이 스쳐간 것 같기도 하다



이번 부활절에는

아무도 부활하지 않았다



부활절 계란에는 마스크 쓴 얼굴들이 그려졌고

집에는 바이러스 대신 먼지가 쌓여갔다

창문을 열면 먼지가 잠시 날아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천사의 잿빛 날개처럼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그러나 자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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