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가 없는 예술을 실현하다.
공학디자인학과 82학번
하이브리드 작가, 차홍규 교수
‘예술에는 도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예술인은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통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한다.
‘하이브리드’. 하이브리드란, 원래 이질적인 요소가 서로 섞인 것으로 이종(異種), 혼합, 혼성, 혼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이브리드란 보통 자동차 등의 공학적 요소에 흔히 쓰이지만, 여기 ‘하이브리드’를 미술에 접목해 예술의 한계를 또 한 번 뛰어넘어보려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우리대학 공학디자인학과(현 산업디자인학과) 출신 차홍규 교수이다. 지금 그가 ‘하이브리드’ 미술을 시작한 이유와 그의 예술적 지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평면 작품과 입체 작품을 같이하는 작가입니다. 미술에서 ‘하이브리드’란 용어를 국내 최초로 박사학위 논문에서 사용하고 ‘하이브리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하이브리드 작가라면?
A. 작품의 장르에서도 평면(회화, 염색, 디자인 등)과 입체(순수조각, 도자, 목공예, 금속, 귀금속 공예 등)를 가리지 않고 여러 분야의 작품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용하는 재료도 종이, 한지, 천, 흙, 금속, 석재, 목재, 천연 염색, 유리 등 을 가용한 재료를 거의 사용하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작품이 장르적으로나 재료적으로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작품을 고수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A. 특별히 제가 고수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예술인입니다. 예술인이 틀에 얽매어 어느 한 분야의 작품만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자유로운 예술인으로 미술의 한 분야가 아닌 다양한 분야를 제가 하고 싶을 때 하려고 노력한 것뿐입니다.
Q. 작품 활동뿐 아니라 현재 용접, 도장, 귀금속, 도자기, 목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국가 기술 자격을 취득한 상당한 기능공이시기도 합니다. 국가 기술 자격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싶습니다.
A. 작품도 결국은 기술이 있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분야에 관계없이 작품을 하고 싶었습니다. 조각을 하려고 용접 국가자격증, 그림을 그리려고 도장 자격증, 그 외 목공예, 도자공예, 귀금속 공예 등 다방면의 국가 기술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미술은 기술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있는 바탕 위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창작품을 뜻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우리대학 산업디자인학과에서 공부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저는 70년대 초 경기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고, 모교가 4년제로 되면서 최초로 3학년에 편입해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형편이 어려웠고, 우리 대학은 국립이었기 때문에 수업료가 저렴하고 교수진도 우수해 당시 국립경기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자연스럽게 4년제가 되면서 모교로 편입해 공부를 이어가게 됐습니다.
Q. 그렇다면 우리대학 산업디자인학과에서 배우셨던 지식이 현재의 작품에 끼친 영향이 있을까요?
A. 우리대학은 전국에서 가장 실습 시설이 잘 돼 있는 교육기관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하이브리드 작가로 자타가 공인하며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은, 즉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또 각종 재료를 사용하며 작품을 할 수 있는 배경은 우리대학의 훌륭한 시설과 우수한 교수진들로 인한 학습효과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Q. 대학 시절 했던 활동 중 가장 도움이 된 활동이 궁금합니다.
A. 어떠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업은 물론, 각종 동아리 활동과 각종 공모전에도 열심히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교수님들의 지도 아래 체계적으로 수업을 받았던 것이 지금의 작품 활동에 많이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우리대학의 선배이시기도 하고 오랫동안 대학교수로 계셨기 때문에 대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도 많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대학 시절에 후배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꼭 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수업도 물론 중요하지만, 책도 많이 보고,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사회를 넓게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 또한 사회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대학 시절 수강한 과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존경하는 신학수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리포트 작성 과제를 주셨는데, 다른 학생들은 10쪽 내외로 제출을 했고, 저는 300여 쪽이 넘는 방대한 양을 제출했습니다. 그 후로 은사님의 따듯한 사랑 아래, 군대 제대 후 3일 만에 전문학교 졸업생임에도 불구하고 당시로는 상당한 직장인 정수직업훈련원(현 정수 폴리텍대학) 교사로 취업을 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지만, 또다시 은사님의 도움으로 개방대학(현 과기대)을 2월에 졸업하고 바로 3월에 대전에 있는 중경공업전문대학 전임 교수로 부임을 하게 됐습니다. 신학수 교수님은 오늘날의 제가 있게끔 도와주신 큰 은사님이십니다.
Q. 예술가라는 직업이 가지는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우선 누구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작품을 한다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현재 나이가 70을 바라보나 정년이 없다는 것도 예술가의 장점 같습니다.
Q. 여전히 예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시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A. 아직 젊기 때문이죠. 물론 신체 나이는 54년생으로 나이가 들었겠지만, 정신 나이는 18살이라는 마음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작품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무거운 조각품도 전시장에 직접 옮기고 설치도 직접 합니다.
Q. 우리대학이 직접 작품을 하는 작가들을 육성하기 위해 전시 이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나요?
A. 우리대학은 서울에서 유일한 국립대학입니다. 서울대도,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들도 미술관이 있습니다. 심지어 제가 젊은 시절 교수로 있었던 전문대학도 대학 미술관이 있습니다. 우리 과기대의 현실은 어떤가요. 대학의 위상에 걸맞게 미술관이 있어야죠.
Q. 과거 한·중 미술협회장으로서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를 위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하셨던 이유가 특별히 있나요?
A. 제가 한국에서 교수를 하다 중국 북경의 칭화대학 미대 교수로 부임하고 10여 년 가까이 근무하다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귀국해 한중 미술협회를 창립하고 5년여 활동하다 이제는 명예회장으로 다른 분에게 물려줬습니다. 많은 중국 인맥을 바탕으로 한중교류에 힘쓰는 한편 후배들이 중국에 진출하고자 하면 도와주려고 합니다.
Q. 지금까지 여러 개인전과 그룹전의 경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전시회가 있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A.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작가로 한국에서 제가 혼자 선정됐고, 다시 중국에서도 제가 혼자 선정됐습니다. 그 때문에 양국 수교 기념작가의 자격으로 참여한 북경의 주중 한국 문화원과 북경 창의 박람회, 한국에서 주한 중국 문화원과 서울시립 DMC 갤러리에서 기념 초대전을 양국에서 동시에 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Q. 작품 활동을 하실 때 선배님만의 신조가 있나요?
A. 특별한 신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매회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작품과 전시에 임하고 있습니다.
Q. 작품의 영감은 보통 어디서 얻나요?
A. 특별히 어디서 얻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잠자다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작업을 하죠.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합니다.
A.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특별한 매뉴얼이 없습니다. 쉽게 되는 작품은 하룻밤에도 완성하고, 길 때는 몇 개월이나 걸립니다. 그러나 시간과 작품의 완성도는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Q. 아직도 국내에서는 예술은 난해하다는 의식이 남아있어 보편화된 문화는 아닙니다. 국내 미술·예술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시나요?
A. 저는 국립 경기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이는 지금 우리 과기대의 전신이죠. 졸업을 하고 바로 전임교수가 됐으나 당시 우리 모교는 석사 과정의 대학원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홍대 대학원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만, 아직도 우리 미술계는 학벌에 대한 위화감이 대단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재학하던 전문학교 시절이나 대학시절 교수 분들도 서울대, 홍대 졸업이라는 알력이 대단했습니다. 이는 우리 대학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반적 문제입니다. 참고로 제가 정년퇴직한 북경 칭화대 미대는 중국의 명문임에도 어느 특정 대학 간 파벌이 없습니다. 실력이 좋으면 어느 대학 가리지 않고 내·외국인도 구별치 않습니다. 이는 우리 대학교들부터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현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특별히 하셨던 노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A. 특별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 모교의 오래된 전통과 우수한 시설, 우수한 교수진이 저를 키워준 것 같습니다. 돈이 없어 모교에 입학했고, 모교 덕분에 젊은 20대 교수가 돼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중국의 명문 칭화대 교수까지 했고, 지금도 왕성하게 작품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노력보다도 저를 이끌어 주시고 사랑으로 가르쳐 주신 신학수 교수님을 비롯해 여러 은사님 덕분입니다. 오늘날 하이브리드 차홍규 작가가 존재하고, 대학원 중심대학인 한국 조형 예술원에서 석좌교수로 근무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모교에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Q. 최근 코로나로 인해 문화계도 활동이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 예술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코로나-19 와중임에도 이번 10월에 국회 초대 작가로 선정돼 10월 한 달간 국회에서 개인 기획전을 하고 있고, 11월은 부산 동방 갤러리 차홍규 초대전을 할 예정입니다. 예술가라면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작가로서 작품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고민이라기보다 최선을 다해 작품을 합니다. 작가는 전시하면서 세 번을 배운다고 후학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전시를 준비하면서, 둘째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을 보면서, 셋째 작품을 철수한 후 빈 곳을 보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앞으로 선배님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뭐 특별한 꿈은…. 지금처럼 열심히 작품을 할 것이고, 기회가 된다면 저의 많은 작품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뜻있고 좋은 곳에 기증하려고 합니다.
Q. 선배님에게 서울과기대란?
A. 보잘것없는 저를 키워주고 꿈을 실현해준 모교입니다. 좋은 은사님을 만나 사람이 됐고, 군 제대 후 직장 알선부터 시작해 현재까지도 후학을 가르치는 재주와 작품을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준 고마운 모교입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졸업생도 한때 과기대에 몸담고 배웠던 사람들이고, 과기대 졸업생이라는 간판으로 사회의 각종 분야에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학생들에게 쏟는 관심 못지않게 졸업생들에 관한 관심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세계 각국에서 57회 개인전을 소화할 정도로 열심히 작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교에 전시장이 있지만) 아직 모교에서는 전시 한번 못 해 봤습니다. 제가 전시할 곳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재학생도 졸업하면 동문이 됩니다. 우리 동문 교수가 아니라도 동문도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선배들의 작품을 후배들이 보며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교육의 일환이자 우리 과기대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