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를 이어받은 노태우 정부는 지방자치제 시행을 미뤘다. 국회가 지방선거의 실시 시한을 정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국민들의 비난과 실정법 위반 시비에 휘말리는 사태를 걱정한 노태우 정부는 결국 1991년에야 지방대표인 지방의회 의원을 구성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1995년에 자치단체장을 선출해 지방자치의 원리에 따라 지방정부를 구성했다.
이제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입법·조직 등 많은 부분에 지방자치단체 자체의 권한이 없다.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은 여전히 8:2고 국가 행정사무에서 지방 정부의 비중은 20% 정도다. 한마디로 오늘날 지방자치는 겉치레를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 지방자치 제도는 집권주의 전통 속에서 태동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중앙집권 정부와 권위주의 통치 전통을 가졌다.
이 때문에 지방자치제도는 제도형성 및 실행과정 등 곳곳에서 집권자 및 중앙 정치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지방자치제도를 둘러싼 개혁 운동과 그 이후의 과정 역시 지방으로부터 중앙으로 즉,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지방자치는 국가 민주화의 일환으로서 요구되고 추진됐다. 결국 지방자치는 중앙의 정치세력들이 정치적 흥정을 통해 ‘위로부터 결정하는’ 정치적 산물로 부활한 것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는 지방이 독자성을 가지고 성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권력 구조를 민주적으로 개편할 수 있는 지방정치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요컨대 강한 집권주의 정치전통, 권위주의 정당 체제 하에서 이뤄진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오랫동안 행정 민주화 수준의 발상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중앙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에 위협이 되는 지방 엘리트의 등장을 두려워 해 지방정치가 활성화되는 것 자체를 병폐로 삼아 각종 방식으로 규제하기도 했다.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지방분권’
정치권에서 말하는 지방분권의 의미는 무엇일까? 정치권에서의 지방분권은 국가 권력의 분력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행정권의 분권을 의미한다. 국가 권력 중 입법권과 사법권은 제외다.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나 주민이 선출한 기관을 통해서 스스로 그 지방을 통치하는 자치체제인 것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대통령에게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된 현행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 대통령조차도 분권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여러 번 밝혔다. 그러나 역대 정부가 지방화 정책을 추구했음에도 경제와 인구의 수도권 집중화는 날로 심화됐다. 지방정부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싶어도 실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에 우리나라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집중된 권력을 어떻게 분산하느냐가 됐다.
중앙으로 집권된 권력을 분산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것과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함께하는 방법이 헌법개정(개헌)이다. 중앙정부는 국가 전체의 과제에 집중하고, 작은 문제는 지방정부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방에 권한을 줘야 하는 것이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지방분권 개헌은 필수 과제다. 실제 미국, 독일 등 선진국이 지방분권이 잘 된 국가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관련 내용은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내년 지방선거에 맞춰 개헌 유력해
올해 새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지방분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분권’을 목표로 현재 8:2 수준인 국세와 지방세 세수 비율을 임기 내 6:4 까지 바꿔놓겠다고 했다. 그는 시도지사와의 간담회에서 연방제에 준하는 강력한 지방분권 공약을 내세웠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공시했다.
지난달 22일(화), 내년에 개정될 새 헌법의 지방분권 밑그림이 공개됐다. 새 헌법에는 강력한 지방분권을 실현할 수 있는 조항이 명문화된다. ‘대한민국은 지방분권 국가이다’가 헌법 제1조에 명시된다.
현행 헌법에서 지방자치단체는 조례 입법권을 가지고 있지만, 국회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인정된다. 새 헌법에서는 이 부분이 수정된다. 제117조에는 ‘지방정부의 자치권은 주민에 속한다. 주민은 자치권을 직접 또는 지방정부의 기관을 통해 행사한다’는 문장이 추가된다. 지방자치권이 중앙정부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에게 속한다는 의미다. 주민이 지방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지방정부 기관에 위임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중앙정부도 주민의 자치권을 존중하도록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입법권 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제118조에 ‘외교·국방국·국가치안 등 국가 존립에 필요한 사무와 금융·국세·통화 등 전국적으로 통일성을 요하는 사업에 대해서만 중앙정부가 입법권을 갖고,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중앙·지방정부가 각각 입법권을 가진다’는 규정이 신설된다.
물론 지방분권 조항들이 개헌안 논의과정에서 살아남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여야의 개헌특위 위원 대부분은 지방분권 강화에 동의하지만, 일부 위원들은 이번 개헌안이 급진적이라며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지자체
‘지방일괄이양법’을 오는 2019년까지 단계적으로 제정할 계획이다. 글자 그대로 중앙권한을 지방으로 일괄적으로 이양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를 설치하면서 단계별로 사무를 이양한 사례가 있을 뿐 아직 지방일괄이양 사례는 없다. 문재인 정부의 지방일괄이양이 성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지방자치단체는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을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다. 지방분권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방 정부의 역할(리더십)이다. 조직과 인력은 발전전략을 추진하는 주요 행위자다. 지방분권이 되면 지방 정부는 여타 지방과 경쟁을 해야 한다. 그들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인구를 늘려야 한다. 세금을 낮추고 서비스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지방 정부를 이끌 수밖에 없다.
부산시는 광역단체 중에서 처음으로 ‘부산형 지방분권 개헌안’을 내놨다. 개헌안에는 지방정부 중심 행정, 지방자치 권한 확대 등을 담았다. 국회의원 선출방식도 하원은 국민을, 상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양원제’로 바꾸는 안도 담았다. 현재의 국회의원 선출제도는 인구비례로 돼 있기 때문에 수도권의 대표성이 과잉 반영되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권역별 대표인 상원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이럴 경우 비(非)수도권 지역의 정치적 비례를 맞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발표한 개헌안에도 양원제 도입과 관련한 조항이 포함돼 있다.
부산뿐 아니라 제주도의회는 중앙정부와 국회에서 논의되는 개헌과 분권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자치분권위원회를 발족했다. 광주시와 대구시는 광주에서 ‘지방분권형 개헌과 지역균형발전 영·호남 대토론회’를 열 정도로 지방분권에 힘쓰고 있다.
대학, 주민참여, 성공적
분명 지방분권은 대학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지방 대학의 위상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은 지방의 위상과도 연관이 있다.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된 탓에 지방 대학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 당시 균형발전을 위해 ‘SKY’로 불리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지방 이전이 추진될 정도로 서울권과 지방의 대학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지방분권을 통해 지방 대학의 위상을 제고할 때가 왔다. 한 예로 지방분권 성격이 강한 독일에서는 지방대학들이 중앙정부에만 재정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에도 재정을 요청한다. 이로써 해당 주 정부의 대학들은 더 많은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자연스레 대학의 질도 높아졌다.
지방 정부의 역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주민들의 참여다. 주민참여는 지방분권을 시행한 최대의 명분이다. 지방자치는 어떤 형태로든 주민참여를 활성화한다. 주민의 참여가 없는 지방자치는 중앙정부의 책임 소재를 지역으로 분산한 것에 불과하다. 지방자치제가 1991년 시작된 이래 주민참여가 진전되고 있다고는 하나 주로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대표적 지역유지에 한정돼 있다. 현재 지역주민의 역할은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데 국한될 뿐 지역의 중대한 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소외되고 있다.
시대적 소명인 지방분권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주민참여가 핵심요소다. 지방분권이 기득권층의 권한 나눠 먹기로 전락하거나 지역과 국민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끝나선 안 된다.
지방분권으로 가는 길
일본과 프랑스
지방분권화는 균형발전과 ‘풀뿌리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초석이다. 하지만 이런 지방분권이 실현되려면 지방재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재정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정도를 ‘지방재정자립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평균 지방재정자립도는 2017년 평균 약 53.6%에 불과하다. 또한, 지역별 재정자립도의 격차도 심각하다. 서울은 재정자립도가 약 85%인 반면 강원, 전북, 전남 등은 평균 27%로 수도권 쏠림현상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이런 지역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에 따라 지방세 인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금의 80%를 중앙정부의 몫으로 하고 나머지 20%만 지방에 부여한다. 이 나머지 20%의 세금이 바로 지방세다. 사실 세금이 더 쓰여야 할 곳은 지방정부다.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은 대부분 지방정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금의 약 60% 정도를 지방정부가 쓰고 있다. 부족한 세금은 중앙정부가 교부금이나 보조금 형태로 지원해 준다. 이렇듯 지방세 비율이 너무 낮아 지방의 재정자립이 미흡한 실정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지방의 균형발전을 보여주는 우수한 모델이다. 일본의 지방세 비율은 약 43%로 우리나라보다 두 배가량 높다. 또한, 세금을 어떻게 쓸지 지방정부가 알아서 결정할 수 있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예산 관리까지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지방정부의 권한이 보장된 것이다.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지방의 사정에 맞춰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런 지방정부의 권한 확대와 더불어 ‘고향세’도 주목할 만한 균형발전 전략이다. 고향세는 주민이 본인의 고향이나 원하는 지역에 기부하면 주민세를 감면받을 수 있는 제도다. 이 정책을 통해 지난해 약 900만엔(한화로 2조 9천억 원)이 지자체로 전해졌다. 고향세가 균형발전 정책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재원 확보 때문만은 아니다. 고향세를 낸 주민들은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주요 상품을 답례로 받을 수 있다. 고향세를 통해 농민들은 타 지역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산물을 홍보할 수 있다.
지방재정의 자립과 아울러 지방분권에 대한 반감도 넘어야 할 산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조선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지방분권의 선두주자인 독일은 사정이 다르다. 독일은 1648년부터 군소 국가들이 연합한 연방제 국가였다. 지금도 이런 연방제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방분권은 아직도 낯선 개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예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도 나폴레옹 집권 이후부터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 하지만 2003년, 지방분권형 개헌을 단행하면서 성공적인 지방분권국가로 발돋움했다. 이는 지방분권 전략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결과였다.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대학이나 공공기관을 분산시켜 왔다. 또한, 국토개발협의회를 지방자치단체대표로 채워 국토개발의 주도권을 지방으로 이양했다. 지자체를 중앙정부의 하수인이 아닌 동등한 국민의 대표로 바라본 것이다. 이런 지방분권 개혁을 통해 현재 프랑스 지방정부의 자치권은 약 90%에 육박한다.
일본과 프랑스의 지방분권 개혁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개혁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오랫동안 중앙집권에 익숙한 국가는 지방분권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과 프랑스가 걸어간 그 길을 우리도 차근히 걷는다면 지방분권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풀뿌리민주주의 :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