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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쳤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남윤지, 박수영 ㅣ 기사 승인 2018-05-22 12  |  603호 ㅣ 조회수 : 2508


  4·19, 5·18, 6·10 이 숫자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 숫자들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날들이다. 영화 '1987', '택시운전사'와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소년이 온다'와 같이 민주화를 담은 다양한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민주화는 수많은 곡절과 시련을 겪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사회는 지식인, 학생, 직장인, 일반인 등 수많은 사람의 투쟁과 피로 만든 결과물이다.



  1960년 4월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 권력에 항거한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가 시발점이 됐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다. 이에 불안해진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화)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선거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당시 자유당은 이승만의 당선을 위해 많은 공무원을 동원했다. ▲4할 사전투표 ▲3인조 투표(반공개 투표) ▲자유당 완장부대 동원(유권자 위협) ▲투표함 바꿔 치기 ▲3인조 투표 (반공개 투표) ▲개표 때의 부정(혼표, 환표) 등이 자행됐다.



  1960년 4월 초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퍼지자, 이승만 정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섰고 마산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 정부는 무고한 시민, 학생의 죽음을 공산당의 책동으로 무마하려 했다. 4월 11일(월) 항구도시 마산 해변가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을 눈에 맞고 만신창이가 된 채 버려진 16세 김주열의 시신이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4·19혁명이 전개됐다.



  4·19혁명은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이날 자정까지 서울에서만 약 130명이 사망했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혁명에 가세하기 시작했고 이승만 정권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에도 군부독재가 계속됐다. 4·19혁명의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박정희 군부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그는 1인 영구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 억압 속에서 계속되던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 16일(화) ‘부·마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난관에 부딪힌 독재 정권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같은 해 10월 26일(금)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국민 대다수는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기대에 찬 국민들은 1980년을 ‘서울의 봄’, ‘겨울공화국이 끝난 민주화의 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최규하 과도 정부를 무력화하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는 12·12 사태를 일으켰다. 12·12사태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점차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외면함과 동시에 휴교령을 내리는 등 민주 세력에 대한 탄압에 들어갔다. 그러자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으로 나아갔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전국의 주요 대학들에 학생회가 구성됐다.



  1980년 5월 18일(일) 광주에서 전남대생 200여명이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충돌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를 본 시민들은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8일을 시작으로 27일(화)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신군부 퇴진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19일(월)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대를 진압했다. 20일(화)에는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 건물을 장악했다. 그러자 계엄군은 모든 시외전화를 끊어 광주를 고립시켰다.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자 시민들은 무장한 채 시민군을 조직해 대항했다. 22일(목) 시민군은 도청을 장악했고 5·18 사태 수습 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시민군은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항쟁은 지속됐다. 27일 병력을 늘린 계엄군은 도청으로 진격해 최후 항전을 벌이던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 전두환은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증명하듯,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발 한발 성장하고 있었다. 1987년 역사적인 일련의 사건들이 겹치면서 소위 말하는 ‘87년 체제’를 통해 본격적인 민주화의 시대가 완성됐다.



  1987년 발생한 6월 민주항쟁(이하 6월항쟁)은 단지 민주화 운동을 넘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다. 오직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막은 사건이 아닌, 60년부터 시작된 강력한 군사독재를 더 이상 주권자인 국민이 좌시하지 않고, 전국민적인 대항으로 맞선 항거이자, 국민들의 자유의지를 되찾은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6월항쟁이다.



  사건은 그해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화) 자정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됐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 연행한 것이다.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고문을 가했고, 박종철은 끝내 14일(수)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했다.



  그해 5월 18일(월)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했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을 향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시위 도중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일련의 사건이 겹쳐 6월 10일(수) 전국적으로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600년 수도를 자랑하는 서울은 민주화의 중심지로 역할을 다했다. 서울광장은 3.1운동, 6월항쟁 등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의 무대다. 이외에도 4·19혁명 당시의 격전지였던 광화문과 태평로, 6월항쟁의 현장이었던 명동성당과 향린교회, 성공회성당 등이 있다.



  민주화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박물관은 3층부터 5층까지 총 4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그중 제3전시실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 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를 보여준다.



  건물 밖 외벽의 작은 공간에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민주화의 길(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이 보인다. 독재에 항거하던 국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진부터, 경찰과 군인들에게 제압당하는 모습까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강북구에는 4·19혁명을 기리는 4·19기념관이 있다. 4·19혁명 기념관은 1층과 2층이 있었다. 1층에는 4·19혁명의 배경, 4·19혁명 내용을 영상매체로 전시하고, 2층에는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재평가에 대한 정보검색, 유물전시 코너 등이 마련돼 있다.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모형은 마치 그 시대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기념관을 나오면 4.19묘지가 보인다. ‘유영봉안소’로 4.19혁명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다. 4·19혁명 희생자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매년 4월 18일에 유족과 4·19단체회원 등이 참여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민주화운동에서 대학의 역할은 매우 컸다. ‘4·18의거’라 불리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의거와 중앙대학교의 6인의 열사 등 대학은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연세대학교는 서울의 중심부인 시청과 청와대와 매우 가까운 지리적인 특성 탓에 학생운동을 하기에 적합했다. 1987년 6월 9일(화), 다음날 열릴 예정이었던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경찰이 폭력진압을 시작했다. 이때 경찰이 쏜 최루탄이 연세대학교 재학생 이한열의 뒷머리를 강타했고, 이한열은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일) 22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친구 이종창에 의해 부축 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은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독재 정권의 폭압을 여실히 드러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민주광장 맞은편에 있는 이한열 추모비는 이한열 열사의 민주화를 향한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기념비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추모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1988년 학생회관 옆 언덕에 이한열 추모비를 건립한 데 이어, 1997년 6월항쟁 10주기를 맞아 추모비가 있는 작은 언덕을 ‘이한열동산’으로 명명했다.



  연세대학교 주변인 신촌에는 이한열 기념관이 있다. 이한열 열사의 유품을 비롯한 6월항쟁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이한열의 어머니가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시민 성금으로 2004년에 세워졌으며, 2014년 사립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이한열이 쓰러질 때 입고 있었던 옷과 운동화를 비롯한 기념물이 전시돼 있다. 전시실 입구에는 이경복 작가의 모자이크 벽화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장 3층과 4층을 이어주는 벽면에는 장례식 행렬을 이끌었던 영정 그림이 있으며, 4층 상설 전시장에는 이한열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또한, 피격 장면 사진과 그를 감쌌던 연세대 화학공학과 학생회 깃발도 기념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 크리스트교의 상징이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명동성당이다. 명동성당은 성지로 불리는데, 이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가 카톨릭 성지로서의 의미라면, 다른 의미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다.



  전국에서 일어난 6월항쟁을 저지하기 위해 6만여명의 경찰이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명동성당으로 밀려났고,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과 투석전이 벌어졌다.



  경찰들은 병력을 투입해 시위대를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을 비롯해 명동성당 측이 경찰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민의 단식투쟁이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항쟁은 더욱 확산됐다. 만약 이들이 경찰에 의해 그대로 진압당했다면 6월항쟁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역사는 현재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역사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만, 언제나 현재를 향하고 있다. 역사를 배우는 데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계기를 배우는 것이다.



  영화 '1987'서 평범한 대학생 연희(김태리 분)가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자고 권유하는 이한열(강동원 분)에게 말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뜻을 함께할 때 세상은 바뀐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조금씩 변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해 똑똑히 봤다. 힘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박수영 기자

sakai1967@seoultech.ac.kr



남윤지 수습기자

libera3395@seoul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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