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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 우키요에
손명박, 김지연, 김미리 ㅣ 기사 승인 2017-10-29 12  |  593호 ㅣ 조회수 : 1498






▲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가 그린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 거센 파도와 위태로운 배, 그리고 후지산의 모습을 묘사했다. 여행 문화의 확산과 함께 풍경을 묘사한 우키요에 또한 인기를 끌었다.

▲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 그린 〈니조마치의 가부키 극장(二丁町芝居の)〉. 극장가에 손님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그렸다. 가부키(연극)를 좋아하지만 날마다 가부키 극장에 갈 수 없었던 관객들은 가부키 극장가나 공연 모습, 배우들의 모습을 담은 우키요에를 보며 대리 만족을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작품을 수용하는 태도는 문화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실제 일본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해주기 위한 소모품으로 만들어진 ‘우키요에’라는 풍속화는 서양 문명권에서는 다른 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우키요에는 특유의 뚜렷한 선과 화려한 색감 등으로 유럽의 유명 작가들에게 영감을 줬고, 이로 인해 우리에게 친숙한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작품에서도 우키요에의 색깔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우키요에의 영향력과 역사를 지금부터 알아보자.



우키요에의 형성 배경



우키요에(浮世繪)는 일본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 전성기를 누린 풍속화이다. 에도는 오늘날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를 말한다. 에도는 한 때 일본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유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일본 열도의 패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거주하던 에도에서 막부*를 개창한다. 일본사에서 에도시대라고 하면 이때부터를 의미한다.



하루아침에 일본의 정치적 중심지가 된 에도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상공업 역시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일본은 동시기 우리나라(조선)와 같이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에도의 상공업 발달과 함께 상인들의 자본력은 지배층 사무라이를 압도하게 됐다. 그들은 경제적 주도권을 바탕으로 마침내 일본 사회 전면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러한 상인들은 일본어로 조닌(町人)이라 부른다.



조닌들 대부분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문화를 향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직접 문화를 창조해내고, 유행시키고, 소비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만들어낸 서민 문화를 ‘조닌 문화’라고 부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그들은 여가를 보내고자 문학(하이쿠), 연극(가부키), 그림(우키요에) 등을 즐겼고, 이들의 문화는 점차 다른 사회 여러 계층까지 펴져 나간다. 우키요에는 조닌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 중의 하나였다.



*막부(幕府): 쇼군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 일본의 군부(무사) 정권.



일상의 소모품이었던 우키요에



‘우키요에’(浮世繪)라는 말은 ‘우키요’(浮世)를 그린 그림(繪)이란 뜻이다. 그럼 ‘우키요’란 무슨 말일까. 우키요는 속세, 지금 이 세상, 현실 세계, 둥둥 떠다니는 세상 등을 의미한다. 즉 우키요에는 지금 이 세상을 그려낸 그림이란 뜻으로, 에도시대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인기 가부키 배우 등 대중적인 소재를 주제로 삼았다.



초기 육필화**로 그려졌던 우키요에는 목판화 기법으로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가격 역시 낮아졌다. 19세기 우키요에 판화 장당 가격은 대다수 조닌들이 한 끼 식사로 삼았던 국수 한 그릇의 가격과 보통 비슷했다. 물론 비교적 비싼 가격의 육필화로 그려진 우키요에도 계속 유통됐지만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량생산된 우키요에 판화들은 그때그때 생활과 유흥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닌들은 우키요에를 통해 가부키 극장과 유곽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여행에 필요한 정보들을 챙길 수도 있었다. 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에도 안팎의 유명 관광지를 묘사한 우키요에를 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우키요에 판화는 오늘날의 신문과 잡지, 그림책, 만화책, 포스터, 브로마이드, 전단지와 같은 소모품으로써 대량생산됐고, 때문에 그 쓰임이 다하면 내팽개쳐지곤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투패의 그림들도 모두 우키요에 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16세기 후반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서양식 플레잉 카드가 도박성 때문에 일본에서 금지된 이후, 규제를 피하고자 카드 위에 우키요에 풍 그림을 그려서 사용한 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화투패의 기원이다.



이후 일본은 서양과 교역을 시작하며 일본산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게 된다. 이때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포장지로 우키요에가 사용됐다. 오늘날 택배를 보낼 때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넣는 구긴 신문지의 역할을 당시 일상의 소모품이었던 우키요에가 맡은 것이다. 이렇게 유럽에 건너간 우키요에는 우연한 계기로 한 프랑스 화가의 눈에 띄게 됐고, 이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유럽 미술사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육필화(肉筆畵): 화가 본인이 비단이나 종이에 붓으로 한 점씩 직접 그린 그림.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천재성을 가졌음에도, 불우한 생을 보냈다. 네덜란드에서 미술 활동을 할 때 반 고흐는 어두운 색채를 활용해 주로 비참한 주제들을 표현했다. 그런 그가 우키요에에 매료되고 나서부터는 달라졌다. 그의 화풍이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역사에 남은 걸작을 그려내게 된다.



그만큼 우키요에는 반 고흐에게 있어서 크나큰 의미였다. 우키요에의 고향인 일본은 자본주의 사회에 지친 그에게 유토피아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이제부터 세기의 천재 화가 반 고흐가 자신의 화풍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준 우키요에가 인상주의 전반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속 우키요에



우키요에는 단순하면서도 화려하다. 일본인에게 익숙했던 이러한 우키요에의 모습은 서양의 전통 회화 기법과 확연히 대조됐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던 파리의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서양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되어 우키요에는 멀리 떨어진 유럽 미술 세계 안으로 스며들게 된다.



우선 에드가 드가(Edgar De Gas)의 작품에서 우키요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인상주의 그룹의 중심에 선 화가였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우키요에에서 볼 수 있는 뚜렷한 윤곽선의 존재를 고수했다. 이는 인물이나 사물을 묘사할 때 윤곽선을 배제하던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에드가 드가 이외에도 여러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는 ▲메리 커샛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그리고 ▲폴 고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메리 커샛(Mary Cassatt)의 동판화는 에드가 드가의 영향을 받아 제작됐다. 우키요에의 영향은 ‘편지봉투에 침을 묻히는 여인’과 ‘겉옷을 반쯤 내리고 대야에 담긴 물로 얼굴을 씻는 여인’을 묘사한 그녀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유럽 회화에서 본령으로 여긴 신화, 종교적인 요소에 대한 묘사가 아니었고, 우키요에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공간의 단출한 일상을 다룬 것이었다.



메리 커샛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로트레크(Lautrec)는 카바레를 광고하는 석판화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의 석판화 포스터 〈디방 자포네〉와 또 다른 포스터 〈자르댕 드 파리〉는 로트레크가 우키요에를 흡수한 방식을 잘 보여준다. 로트레크가 활동했을 당시 유럽의 석판화 포스터는 인물의 입체감을 살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림1)로트레크가 그린 〈자르댕 드 파리(Jardin de Paris)〉 포스터. 그 당시 유명했던 무용수인 제인 아브릴(Jane Avril)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는 일반적인 유럽의 석판화와 달리 우키요에처럼 입체감을 무시하고 대담한 색면과 율동적인 곡선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그림2)폴 고갱(Paul Gauguin)이 그린 〈설교 뒤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The Vis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폴 고갱의 그림에서도 우키요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설교 뒤의 환상〉에서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들은 그림 앞쪽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앞쪽에 천사와 야곱이 씨름하는 자세로 뒤엉켜 있다. 그는 반 고흐에게 이 작품을 설명할 때,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브르타뉴 여인들이 기도하면서 떠올린 장면이라고 했다. 따라서 고갱은 여인들이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일상의 사소한 국면을 포착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대담한 붉은색면과 율동적인 곡선 역시, 우키요에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반 고흐와 자포니즘



자포니즘(Japonism)이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 미술 전반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인 취향 및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반 고흐는 이러한 자포니즘에 깊이 빠져 있었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일본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인류를 타락시키기 이전, 모두가 자연 속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하고 만족했던 ‘에덴동산’이라고 칭송하며, 일본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이러한 환상은 그의 작품 〈탕기 영감의 초상(Le Pe’re Tanguy)〉(그림4)에서 잘 나타난다. 탕기는 미술품 딜러이자 재료상으로 반 고흐와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을 사 주고, 외상으로 물감을 대주는 등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한 반 고흐처럼 열렬한 사회주의자였고, 유토피아를 열망했다고 한다. 〈탕기 영감의 초상〉에는 그림 정중앙에 탕기가 앉아있고, 그의 뒤편 벽 가득히 우키요에가 걸려있다. 그중에서도 후지산은 탕기의 후광인 양 머리 위로 높이 솟아올라 있다. 초상화라면 중심인물에 입체감을 주는 것이 맞지만, 영감의 얼굴은 우키요에의 색채에 파묻혀 화려한 우케요에에 섞여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후 반 고흐는, 환상 속에 가지고 있는 일본의 자비로운 이상적 세계를 프랑스에 건설하고자 하여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로 떠난다. 그는 자기와 함께 이상을 실현하고 미술을 함께 할 화가들을 초대했는데, 그의 초대에 답한 사람은 오직 고갱뿐이었다. 하지만 반 고흐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이루기 힘들었고, 잦은 불화 끝에 고갱은 반 고흐를 떠난다.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부터 반 고흐는 큰 절망감을 느끼고 자기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발화를 일으키고 만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는 여전히 색감이 화려한 우키요에적 요소가 나타나는데, 이는 절망 속에서도 이상을 현실로 이루고 싶었던 반 고흐의 소망을 보여준다.



한편 1868년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멸망하고 일왕 중심의 근대 국가가 성립한다. 이러한 변혁의 과정을 일본사에서 ‘메이지 유신’이라고 부르며, 이 무렵을 ‘메이지기’라고 무른다.



메이지기 우키요에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우키요에가 보도적인 성격을 지닌 신문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메이지기 우키요에 화가들은 당시 장안의 화젯거리를 잘 잡아내어 판화로 그려냈다. 그리고 일본 국민은 우키요에를 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역사학자들은 메이지기 우키요에를 보고 각종 사회적 사안에 대한 당대 일본인들의 시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대한제국)을 주제로 한 사안들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메이지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는 데 이 무렵의 우키요에가 역사적 자료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 우키요에는 ▲운요호 사건 ▲임오군란 ▲청일전쟁 등 한국사의 큼직큼직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림3)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가 그린 운요호 사건을 묘사한 그림. 이 무렵 우키요에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이 가졌던 편협한 한국관을 알 수 있다.



일상의 소모품으로 사용되던 우키요에는 메이지기 개항과 함께 서구의 사진, 기계인쇄 기술 유입으로 점차 수요가 떨어지며 쇠퇴했다. 그와 함께 이 무렵 우키요에가 수행하던 신문적 역할 또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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