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층 전시실은 신문의 역사를 다룬다. 들어가자마자 세계의 신문 1면이 벽 한쪽을 장식하고 있다. 그 옆에서 한국 신문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한국 신문의 역사는 1883년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발간된 한성순보에서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민간 신문은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황성신문의 11월 20일자 논설에서는 을사조약에 슬퍼하는 글로 유명한 ‘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라는 장지연의 기사도 볼 수 있다.
▲ 세월이 흘러 기록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오래된 기자의 책상 위에는 분주한 한낮과 치열한 밤의 흔적이 배어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간 신문은 전부 폐간의 아픔을 겪었다.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을 마지막으로, 광복 때까지 5년간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외에 민간 신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광복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복간되고, 좌익계 신문인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 등이 창간되면서 이념의 좌우 대립이 시작됐다. 좌익계 신문과 우익계 신문의 이념 대립은 특히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극에 달했다. 그에 따라 신문사에 테러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남한 총선거를 통해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자 좌익계 신문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우익계 신문이라 해도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은 탄압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말기에 부패 부정선거로 얼룩졌고, 부정선거에 항의해 벌어진 마산의 대규모 시위에서 사망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오르면서, 언론은 이 사진과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은 4·19혁명의 기폭제가 돼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독재 시대 신문은 민주화 운동을 하는 주요 부서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5·16 직후 민족일보를 북한의 활동을 고무 동조했다는 혐의로 폐간시키고 사장 조용수를 사형에 처했다. 결국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비판하는 보도를 일절 금지하고, 전두환 독재정권은 언론 통폐합을 감행했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고, 6·29 민주화 선언과 함께 언론 자유가 회복됐다. 신문의 역사 사이에는 ‘기자의 책상’이라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신문의 역사 코너를 지나면 신문 만화의 역사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1909년 대한민보 1면에 등장한 ‘삽화’가 한국 신문 만화의 시초다. 삽화는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당시에 여러 사람의 마음을 모아 나라를 건져낼 궁리에서 시작됐다. 일제시대 만화는 주로 일본의 언론 탄압과 현실을 풍자했다. 일본의 감시 때문에 작가들은 본인의 이름을 걸지 못하고 익명으로 만화를 그렸다.
▲ 5층의 신문 만화의 역사코너. 당시의 만화를 볼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4칸 만화가 등장했다. 시사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신문만화는 장편만화, 수필식 만화 등 다양한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현대에는 사진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만, 만화는 풍자와 비유의 주요 수단 중 하나다.
이후 신문 디자인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조판 기술의 변화에 따라 납 활자(핫타입) 시대, 사진식자(콜드타입) 시대, 디지털 시대로 구분된다. 특히 신문 디자인의 큰 변화를 끌어낸 것은 한글전용의 흐름과 사진식자의 도입이다. 한글전용의 대세와 함께 신문이 세로쓰기 문화에서 가로쓰기 문화로 바뀌면서 일본적 신문지면 구조에서 벗어나 한국형 신문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사진을 식자하며 독자들의 눈에 띄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6층에선 아이들과 함께 온 학부모들이 신문제작체험을 하고 있었다. 촬영실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이용해 기사를 작성하면 신문을 만들 수 있다. 티켓에 신문제작체험 쿠폰이 포함돼 있어 별도의 요금 지불 없이 체험할 수 있다.
▲ 신문 박물관 6층에서 신문제작체험이 가능하다.
거창한 체험이 아니라 성인에게는 재미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온 학부모들에게는 좋은 교육이자 체험 거리다. 또, 기획 전시로 ‘어느 의학기자의 역병 리포트’가 전시 중이었다. 대한제국부터 시작된 전염병 예방규칙과 관리체계의 역사를 신문기사로 만나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 기획 전시는 기자가 방문한 날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1. 제호
제호는 신문의 이름을 의미한다. 본지의 제호는 2010년 9월 ‘서울산업대’에서 ‘서울과기대신문’으로 변경됐다.
2. 날짜 및 발행호 수
본지는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 격주 발행을 원칙으로 한다. 매 호 신문의 오른쪽 상단에는 호수와 발행 날짜가 표기돼 있다. 본지는 매년 15호씩 발행한다.
3. 면 소개
본지의 면은 크게 ▲보도 ▲문화 ▲사회 ▲DO ▲오피니언 ▲인터뷰 면으로 나뉜다. 보도는 1면부터 5면, 문화는 6·7면, 사회는 8·9면, DO는 10면, 오피니언은 11면, 인터뷰는 12면을 차지한다. 제호 밑에는 각 면의 주제를 알 수 있는 소제목이 위치하고 있다.
4. 기자의 이름과 E메일
‘바이라인(by-line)’은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에 필자의 이름을 넣는 것을 말한다. 본지의 모든 기사에는 바이라인이 있다.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 기자의 e메일 주소를 함께 표기하고 있다. 본지의 기자들은 우리대학 메일을 이용하고 있다.
5. 톱날무늬 자국과 바늘 자국
톱날무늬는 톱날 형 칼날을 이용해 신문 크기로 자르면서 생기는 자국이다. 바늘 자국은 인쇄된 신문을 바늘로 눌러 자르고 접는 과정에서 생긴다.
6. 신문에 쓰이는 글자
신문에 쓰이는 문자체는 ‘산돌신문제비L’이다. 평균 신문 한 면에 들어가는 글 분량은 A4용지 3장 내외의 분량이다.
[신문의 별별 판형]
판형이란 인쇄물 크기의 규격을 말하는데, 신문은 다양한 판형으로 존재한다. 대표적인 판형으로는 ▲대판 ▲베를리너판 ▲타블로이드판이 있다.
대판(가로: 391mm, 세로: 545mm)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판형으로, 조선일보 등 많은 기성 언론사가 대판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 면이 넓어 다양한 편집이 가능하며, 뉴스의 가치를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본지는 대판을 조금 변형해 사용하고 있다.
베를리너판(가로: 315mm, 세로: 470mm)은 대판과 타블로이드판의 중간크기로, 1800년대 독일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알려진다. 베를리너판은 대판의 약 2/3 크기로 휴대하기 편리하며, 시선을 많이 분산시키지 않고 한눈에 기사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에 중앙일보가 이 판형을 처음 사용했다.
타블로이드판(가로: 272mm, 세로: 391mm)은 기존에 발행되는 신문 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의 신문이다. 타블로이드는 ‘기사를 요약, 또는 압축한다’는 뜻으로서, 한 면에 2, 3개의 기사밖에 싣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발행 비용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타블로이드판을 쓰기도 한다.
박종빈 기자
krist602@seoultech.ac.kr
권나경 기자
mytkfkd1109@seoul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