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것의 신선함
통 넓은 청바지, 도트 무늬 원피스, 꾸밈없는 투박한 가게 간판은 우리가 ‘레트로’란 단어를 듣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레트로 스타일이다. 레트로는 회상, 추억이라는 뜻의 ‘Retrospect’의 준말로 과거의 전통을 그리워해 옛 상태를 본뜨려고 하는 유행이다. 음악, 패션, 디자인 등에서 친숙하게 다가온다.
최근에는 단순히 예전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는 레트로 스타일을 넘어서 새로운 소비 경향인 ‘뉴트로 현상’이 등장했다. 뉴트로(New-tro)는 새롭다는 의미의 뉴(New)와 복고의 의미를 지닌 레트로(Retro)가 합성된 말로, 경험해보지 못한 옛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기존의 ‘레트로’가 경험했던 ‘옛것’에서 느끼는 그리움을 호명한 것과 대조적으로 ‘뉴트로’는 경험해보지 못한 ‘옛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따라서 뉴트로의 주 소비 계층은 그 시대를 경험한 중장년층보다 젊은 청년 세대다.
풍요와 다양성이 특징인 현대사회에서 자란 젊은 세대에게 옛것이 지닌 ‘불완전함’은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매력 포인트가 돼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것이 젊은 세대가 뉴트로에 열광하게 된 이유다.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요즘 옛날, 뉴트로’를 2019년 핵심 트렌드 키워드로 꼽는 등 뉴트로의 영향력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뉴트로 트렌드에 맞춰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뉴트로의 상징이 된 휠라(FILA)는 지난 2017년 1970년대 감성을 재현한 복고풍 운동화 ‘디스럽터2’를 출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디스럽터2는 150만 켤레 이상 판매되며 해외에서도 명성을 얻어 미국 슈즈 전문 미디어 풋웨어뉴스에서 2018년을 대표하는 신발로 선정됐다. 또한 휠라는 브랜드의 역사를 현대적 시각으로 해석해 로고를 강조한 제품을 출시했고 이후 5회 이상 리오더가 진행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식품업계 또한 뉴트로에 힘입어 다양한 신제품을 출시 중이다. 지난해 삼양식품은 별뽀빠이 스낵 출시 47년을 맞아 1980년대 디자인을 그대로 재사용해 큰 인기를 끌었다. 과거에 사용했던 봉지 디자인에 삼양식품 로고와 글씨체를 그대로 담아 출시된 ‘별뽀빠이 레트로’ 패키지는 1시간 만에 1000개 한정 수량이 완판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지난 2월 농심은 1990년대 단종된 ‘해피라면’을 재출시했고 출시 20일 만에 750만개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방송가도 뉴트로 열풍이다. 지난 3월부터 방영중인 MBC ‘호구의 연애’는 90년대 연애 버라이어티를 떠올리게 하는 뉴트로 예능이다. 여행 동호회 회원들의 여정을 담아내는 장치로 복고를 선택했다. 중장년층에게는 익숙한 향수를, 2030 세대에게는 트렌디한 여행을 제시한다. 방송사 Olive는 ‘노포래퍼’를 방영하고 있다. 오랜 전통을 지닌 노포(오래된 가게)에 새로움의 아이콘인 래퍼가 방문해 세월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담는다. 젊은 세대와 중장년층의 소통 기회를 선사한다.
레트로는 이전에도 수시로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젊은 세대를 공략한다는 면에서 뉴트로는 이전의 레트로와 차별화된 트렌드다. 디지털 시대에 피로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무자극의 자극’을 전해주는 뉴트로가 어떤 따뜻한 바람을 일으킬지 지켜보자.
익숙한 듯 낯설었던 LP의 세계
조심스럽게 음반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리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바늘은 비닐 재질의 골을 따라 움직여 잡음까지 재생시킨다. 자칫 보관을 잘못해 한 곳의 노래가 반복되거나 튀기도 한다. 이렇듯 LP 속 음악을 재생시키기까지 꽤나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LP는 20세기의 음반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지만 시간이 지나 간편한 CD가 등장하면서 사라져 갔다. 나아가 현재는 휴대폰으로 음원 10곡을 내려 받는 데 1분이 채 안 걸리고 터치 한 번이면 원하는 노래가 바로 흐른다. 하지만 쉽게 받은 음악은 그만큼 쉽게 지워진다. 지금은 뉴트로 시대. 음악을 ‘소비’하는 시대에 다시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타나고 있다, 뒤안길로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LP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LP는 90년대 중반부터 일부 리믹스 앨범이나 인디뮤지션들의 소수앨범을 제외하고는 소량 유통되는 정도에 그쳤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서라벌 레코드’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LP가 사라졌다. LP는 국내시장에서 잊혀진 매체였고 일부 애호가들이 중고 매장을 통해 구입하는 골동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젊은 세대들의 LP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2018년 미국의 총 앨범 판매 중 LP의 판매량은 전년대비 14.6% 상승했다. 이는 1991년 이후 최고 매출이며 LP가 낯선 10-20대들의 소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젊은 세대가 LP문화를 소비하게 된 큰 이유는 기존의 CD나 음원에서 볼 수 없었던 실물크기와 패키지 안에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부가 구성품 때문이다. 다양한 패키지 구성은 젊은 소비자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MD상품처럼 기능하며 소비의 정당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LP는 단순히 추억의 산물로 취급되는 매체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서 LP를 향유하지 못한 젊은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매체로서 소장가치를 보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소비자들의 추세에 힘입어 종적을 감췄던 LP 제작 공장이 다시 부활했다. 아델, 테일러 스위프트 등 해외 팝스타들의 음원부터 원더걸스 좥아름다운 그대에게좦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정규 1,2집 앨범 그리고 박재범과 기린의 「CITY BREEZE」가 LP로 발매된 바 있다. 이렇듯 LP판의 국내 수요를 고려해 2017년 6월 성동구 성수동에 LP 생산업체인 마장뮤직앤픽쳐스가 ‘바이닐팩토리’를 열었다. 국내 기획사나 음반사가 LP 음반을 발매하려면 평균 5~6개월이 소요되지만 ‘바이닐팩토리’를 통해 3~4주로 기간 단축이 가능해졌다. 또한, 공장은 LP 마스터링 및 커팅, 프레싱 패킹 전 과정이 한 곳에서 이뤄지는 ‘올인원‘ 시스템을 갖췄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오로지 순수 국내 기술과 순수 국내 재료만을 사용한다. LP 제조 과정의 핵심 기술인 프레싱기계를 국내산 부품과 설비로 자체 개발했다. 이런 기술로 나온 ‘바이닐팩토리’의 첫 발매작은 조동진의 6집 앨범 좥나무가 되어좦였다. 더해,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의 앨범 「Bach: Sonatas & Partitas」 와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등이 발매됐다.
LP의 인기는 페스티벌로도 이어졌다. 국내 유일의 레코드 중심 음악 축제인 ‘서울레코드페어’가 2011년부터 성황리에 이어져 왔다. 처음에는 약 2천여 명으로 시작된 행사였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방문객이 증가하면서 국내 최대의 레코드 축제가 됐다. 행사는 약 80여 개의 음반 판매점, 음악 레이블 및 배급사, 독립 음악가, 음향기기 업체, 출판사, 개인 판매자 등이 참여하는 부스들로 구성되며 입장료는 무료다. 올해도 열릴 ‘서울레코드페어’에 주목해보자. 다른 곳에서는 가질 수 없는 훌륭한 아티스트들의 작업물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LP는 희귀하거나 구하기 어려운 음반들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닌 수집하고 소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때론 보물처럼 접하기 어려운 음악들을 직접 앨범으로 구입하고 음악행사에 참여하며 음악을 몸소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낯설지만 익숙해질 LP를 하나의 문화로 향유해보자.
▲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외관 ▲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내부 ▲ LP BAR 블루먼데이
LP를 경험해볼 수 있는 공간
1)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현대카드는 LP의 매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195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중요한 매개체로 자리매김한 LP의 영역을 재생 기기에만 한정짓지 않는다. 철학, 라이프스타일, 기술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아날로그 매체로 본다. 무형의 음악을 보고 만지고 들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매체로서 LP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이념을 토대로, 현대카드는 음악에서 비롯한 울림을 일상의 영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는 약 1만 여장의 LP을 보유하며 진정한 아날로그적 음악을 체험할 수 있다. 희귀 음반, 재즈, 소울, 록, 일렉트로닉, 힙합, 한국 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준비 돼있다.더불어 장르와 연대의 흐름을 한 눈에 조망하도록 구성한 인포그래픽 맵과 자신의 음악 취향을 발견하기 위한 ‘Quick Guide’를 제공한다. 현대카드 회원만 입장 가능하며, 동반 2인이 무료 입장할 수 있다. 만 19세 이상 회원이 이용 가능하고, 월 8회로 이용 횟수가 제한된다.
ㆍ주소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46
ㆍ운영 시간 : 화~토 오후 12시 9시, 일 오후 12시 6시
2) 평균율
떠오르는 ‘hip한’ 공간인 을지로에 위치해 있다. 재즈, 블루스, 소울 장르를 주로 다루는 LP BAR다. 오후 5시 이전까지는 카페를 운영하고, 이후에는 BAR로 변한다. 감성적인 인테리어와 예술을 향한 사랑이 돋보이는 분위기가 특징이다. 신청곡을 적어서 내면 가게 내에 있는 턴테이블로 음악을 틀어준다. 다만 내부 공간이 협소해 입장 대기 시간이 발생할 수 있다.
ㆍ주소 : 서울 중구 충무로 4 길 3
ㆍ운영 시간 : 오후 12시~24시, 일요일 휴무
3) 블루 먼데이
합정에 위치한 LP BAR로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서 내면 가게에 있는 음반으로 음악을 틀어준다. 디지털 음원은 이용하지 않아서 신청곡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LP와 CD만 활용한다. 하지만 이것이 묘미다. 적어서 낸 음악 중 어떤 음악이 나올지 기다리고, 음악이 나왔을 때 느끼는 희열이 대단하다. 주로 옛날 LP나 록 음악이 많다. 술과 안주의 가격이 학생에게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한번쯤 음악과 여유를 즐기기에 적합하다. 격주 일요일은 휴무이기 때문에 미리 연락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
ㆍ주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396-61
ㆍ운영 시간 : 오후 6시 오픈, 격주 일요일 휴무
4) 도프레코드
LP를 충분히 경험하고 만져봤다면 자연스럽게 턴테이블과 LP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LP를 판매한다. LP뿐만이 아니다. CD와 카세트도 판매한다. 폐간한 음악지나, 유명 가수들의 공식 굿즈를 팔기도 한다.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음악 서적들도 팔고 있어 음악 덕후들의 성지다. 재고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미리 확인하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좋다. 온라인 판매는 하지 않는다.
ㆍ주소 : 서울 마포구 도화동 267 DOPE RECORDS
ㆍ운영 시간 : 매일 오후 1시~9시, 월요일 화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