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집행
소설가는 글을 쓸 때 첫 문장 하나를 위해 며칠을 고민에 빠질 때도 있다. 특히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쓸 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한 문장을 ‘꽃이’로 쓸지, ‘꽃은’으로 써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나를 거쳐간 수 백 권의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첫 문장은 단연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이다. ‘나는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책을 덮고 한참의 생각에 빠진 것은 가슴 조였던 스토리가 아니라, 그 열네 자의 음절로 이루어진 첫 문장이었다.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세상이 시끄러울 때 그는 하늘 높이 학사모를 들어던졌다. 그는 가족 중 유일한 대졸자였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막일을 하던 형, 상고를 중간에 나와 미용실을 하던 누나와는 달랐다. 그의 부모님은 물론 형, 누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조카들까지도 서너 시간이 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날 그의 옆에는 1년 전 백년가약을 맺은 만삭의 과 후배도 있었다. 그들의 첫 살림에는 작은방 하나, 그녀의 아버지가 사주신 장롱 한 짝이 전부였다. 학생 신분에서 결혼을 해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랑은 대학시절 방송국 아나운서도 하고 철학에 관심이 많던 청년이었다. 그녀는 그 모습에 반해 그에게 빠졌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도 꽃이나 목걸이도 아닌 대뜸 건네주는 이외수의 ‘들개’같은 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소주 대병 하나로 시작해 저녁쯤이면 온 가족에게 주사를 부리다 끝나는 하루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형을 따라다니면서 막노동을 해야 했다. 방학이라는 것도 없이 호프집, 레스토랑 서빙, 당구장 등 안 해본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세상의 실낱같은 빛을 보기 전부터 그의 꿈에 사형집행을 했다. 건축학과를 나와 멋있는 건축물을 지으려 했던 그는 꿈을 접었다. 만삭의 그녀와 한두 달 뒤면 세상에 나올 나를 위해 당장의 돈이 필요했을 터였다. 세상은 차디 찼다. 이십 대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어쩌면 보기보다 큰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청춘이라는 대학생의 단어보다는 ‘가장’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더 와 닿았을 것이다. 신부의 배가 불러오고 달력에 쳐진 동그라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 부담도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무원이라는 시험을 보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대개 끝이라는 것과 동일시된다. 마치 3월 모의고사의 점수가 내 수능 점수와 똑같은 것처럼. 아마 공무원이라는 그의 직업은 처음과 끝이 될 듯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욕심이 많았다. 반장 선거, 전교 회장 선거 등 안 나가는 선거도 없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는 날이면 그 연노란 것을 일부러 가방에 넣지 않고 남들 보란 듯이 손에 쥐고 집에 갔다. 어릴 때는 욕심의 크기가 머리의 크기와 어느 정도 정비례할 것이다. 내 욕심이 정점을 찍은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1학년 때 어쩌다 운 좋게 교육청 주관 영재교육원에 합격을 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친구들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고3들이나 봐야 할 화학 2, 물리 1 같은 참고서를 공부하고 있었다. 다들 과학고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교육은 필수였다.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학원 5개, 독서실, 참고서 등에 수백만 원의 돈을 들였다.
동생이 다니던 학원들을 그만둔 것을 시작으로 우리 가족의 모든 여가가 사라져버렸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딱 세 가지였다. 신혼여행부터 들고 다니던 필름 카메라, 주말이면 항상 켜져 있던 오디오, 그리고 가족끼리 일 년에 한 번 여름에 가는 휴가였다. 이 모든 것이 점점 내 눈앞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가까운 명소라도 들려 사진을 찍던 우리 가족의 주말은 나를 학원을 데려다주는 것으로 변해버렸고, 책장에 꼬박꼬박 꽂혀있던 앨범도 더는 늘어나지 않았다. 셔터 소리가 독특했던 그의 카메라는 나프탈렌 냄새가 퍼진 붙박이장에서 잠이 들었다. 주말 아침이면 ABBA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오디오도 거실에 없었다. 그에게 남은 취미마저 난 단두대 위로 올려버렸다.
남자들은 군대를 갔다 오면 철이 든다고 한다. 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에 대한 시선이 조금씩은 변하게 된다. 슈퍼맨같이 보였던 부모가 사실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인간임을 점점 깨닫는다. 눈가에 주름이 하나씩 생기고, 없던 고집이 생기는 것부터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병원과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이 의사를 찾는 날이 점점 많아졌을 때,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였다. 그에게 근심 걱정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내 욕심만을 쫓기 위해 살아왔던 어린 날의 행동들이 후회로 남았다. 점점 돈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난 이제 다 큰 성인이니까’라는 다짐과 함께 최대한 돈을 아끼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에게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신부를 위해 돈을 쓰길 바랐다. 더위가 기승했던 어느 중복 날, 그는 대뜸 오늘 뭘 먹을 거냐고 메시지로 물어봤다. ‘오늘 복날인데, 아덜 삼계탕이나 잡수시지? 아님 저녁에 친구랑 치킨이라도 좀 먹고’ 나는 쓸데없이 비싼 걸 먹냐고 반문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내가 돈에 민감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날 밤, 그는 취기에 섞여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빠 창창하다. 돈 걱정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당당하게 살아.” 역시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어릴 때 자신은 해보지 못한 것들을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은 못 했지만, 내 자식은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것이 그의 삶을 버티게 해준 두터운 말뚝 같은 것이었다. 한두 시간이 지나고 그의 동반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가 쪼매 힘든가 보네. 난 별로 신경 안쓰니까 엄마가 옆에서 그냥 아빠 잘 봐줘용~~ 엄마 몸 건강도 좀 챙기시고’
‘응 그러게
엄만 괘안아졌어..
할튼 열공하고 당당하게 살어 몇십년이 지나도 니인생에 당당하게..
부모는 할만큼만 할수있는 존재가 되붓다 아덜’
나는 그날 밤, 그에게 남은 아버지로서 마지막 자존심까지 사형을 집행했다.
지난 6월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고 친구 몇 명과 학교 앞에서 간단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나이는 같지만 나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나 누나인 사촌에게 메시지가 왔다. ‘이모부 괜찮으셔?’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라 바로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익숙했다. 5년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걸려왔던 수화기 너머로 듣던 것과 비슷했다. 외할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모부도 뭐 나왔다고 하던데. 별말 없으셨어? 나도 자세히 모르겠는데 한번 전화해봐”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2주 전 엄마와 같이 건강검진을 하러 갔다는 것은 메시지로 봤지만, 오늘 아침 통화까지도 별말이 없었다. 통화연결음이 끊기자마자 난 약간 술기운 때문인지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물어봤다.
“아빠 어디 아파?”
“무슨 소리야. 누구한테 들었어?”
“아니 말 돌리지 말고.. 어디 아프냐고”
“누구한테 들었냐니까”
“아까 유정이한테 들었는데… 아빠 뭐 나왔다매”
“응 그냥 직장암. 괜찮아.. 뭐 죽는 것도 아니라는데”
술집 옆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정문 앞에서 난 무너져 내렸다. 잠깐 담배를 태우러 나온 친구들은 갑자기 이상한 내 행동을 보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난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걱정할까 봐 눈물을 참으려 해도 이미 터져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화단 앞에 주저앉아서 휴대폰을 멀리 떨어뜨려놓고 그와 그녀의 목소리에 벗어나 잠깐 기다릴 뿐이었다.
“아.. 언제 나왔는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해? 내가 그걸 유정이 통해서 들어야겠어?”
“아들.. 엄마가 나중에 말 할라 했는데 어찌 벌써 알아버렸네? 아빠 괜찮아. 요즘 아빠 술도 안 마셔서 얼마나 엄마가 편한 줄 알아? 리모컨도 요즘 엄마가 쥐고 살아”
“아.. 그래도 나한테 먼저 말을 해야지”
“엄마랑 아빠가 그건 진짜 미안해. 어차피 곧 서울 올라가는데 그때 되면 말하려고 했지”
7월 초가 되어 부모님은 서울의 큰 병원에 수술 날짜를 잡기 위해 기차를 타고 올라오셨다. 용산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데 별생각이 다 들었다. 플랫폼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혹시나 눈물이 나올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어두워졌을지 모르는 그의 표정도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저 너머에서 보이는 두 분의 표정은 활짝 웃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더 걱정할까 봐 일부러라도 걱정을 감추고 더 기뻐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병원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병에 대해서 말했다.
“야. 암 환자가 너무 쌩쌩해 보이지 않냐?”
“요즘 엄마 몇 년 만에 저녁이 완전 행복하다”
10월 4일, 아침 6시가 되기 전부터 청원휴가를 나온 동생을 깨워 급히 씻고 지하철을 타러 나왔다. 첫차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앉을 자리도 없었다. 아침 8시 수술 예정이지만 혹시 수술실은 일찍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병실에 도착하니 그는 이미 씻고 나와있었다. 그리고 30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간호사가 휠체어와 담요 하나를 가져와 이제 수술실로 가야 한다고 했다. 10층에서 수술실이 있는 3층까지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수술실 자동문 앞에 섰을 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 나는 잠깐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는 병원에 처음 왔던 날처럼 손가락 하트를 하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 동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손을 한 번씩 잡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실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그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