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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창작상 : 소설 최우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수상자 : 김우영)

 

  언니는 떨어졌다.

  그날 언니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엄마는 내게 언니를 데려오라고 시켰다. 문을 열자, 책상 밑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언니가 보였다. 언니는 생기 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문, 잠겨 있었어?”

  “아니.”

  “근데 왜 이제야 들어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언니에게 나는 그때 무슨 대답을 했었나. 언니는 가만히 서 있던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방문을 닫았고 그날 언니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문은 끝내 잠기지 않았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언니의 방 안에 있다. 책상 밑, 언니가 웅크리고 앉아 있던 자리와 마주 보고 앉은 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불행한 일과 행복한 일은 똑같은 횟수로 일어난다고. 내게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언니를 알았다면,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서 꺼내지 못할 것이다. 언니는 내게 하나의 증거였다. 불행한 일을 훨씬 많이 겪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 행복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 언니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

  언니는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그런 언니를 보면서 책상 밑에 뭐가 있길래 언니가 온종일 책상 밑에 있는 걸까, 궁금했다. 그래서 언니가 학교에서 오기 전에 책상 밑에 들어가 봤다. 막상 들어가 봤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실망했고 지루해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 언니는 책상과 벽 사이 틈에 일기장을 껴 놓았다. 일기장은 책상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굽히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야 보였다. 일기장 위에는 볼펜으로 내리찍은 듯한, 옴폭 들어간 점이 군데군데 있었다. 점으로 가득한 일기장 속, 언니는 왕따였다. 내게 언니는 일기장을 읽기 전의 언니와 읽은 후의 언니로 나뉘었다. 일기장을 읽은 후 내게 언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왕따를 당한 사람이었다. 아는 사람, 특히 가족의 일기장을 읽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다. 알아서는 안 되는 걸 알아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짜릿하지 않다. 불안하고 찝찝하다. 그때 일기장을 읽지 않았다면 넘어갈 수 있었을까, 몰랐으니까 넘어가도 괜찮았을까. 하지만 나는 알아버렸다.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게 언니한테 잘해주라고, 동생인 네가 언니를 잘 챙겨주라고 자주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엄마와 아빠는 언니에게 자주 물었다.

  “네가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어. 뭐 잘못한 거 있니? 그래서 애들이 싫어하는 게 아닐까?”

  엄마와 아빠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언니가 여름에 땀을 뻘뻘 흘려도 카디건을 벗지 않거나 교복 대신 체육복을 입고 집에 올 때, 교복을 다시 사야 한다고 했을 때, 엄마와 아빠는 가해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만나고 학교에도 찾아가고 경찰서에도 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구석으로 숨는 언니를 데리고 여행을 가기도 했고 유명한 의사가 있는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비싼 약을 지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언니는 변하지 않았다. 집에서 먼 곳으로 전학 간 학교에서도 언니는 애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언니는 숨기 바빴고 엄마와 아빠는 지쳐갔다. 그들의 잘못이 분명하다고 들었던 생각이 점점 ‘우리 애의 잘못도 있지 않을까’로 변해갔다. 엄마와 아빠는 물러났다.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언니 일기장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일기장 위처럼 언니가 학원에서 프린트한 시험 예상 문제지 위에도 옴폭 들어간 점이 많다. 깨끗한 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손가락 끝으로 점 주위를 살살 만져야 겨우 느껴진다. 언니는 공부할 때 왼손으로 머리칼을 쥐어 잡고 오른손엔 펜을 쥔 채 종이 위를 내리찍었다. 저주 인형을 바늘이나 못으로 찌르는 것처럼 언니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펜을 세게 쥐고, 퍽퍽 소리가 나도록 종이 위를 내리찍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문 앞에 서서 보고 있었다. 그때 본, 베란다에 비친 언니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언니는 더운 여름에도 카디건을 입고 다녔다. 덥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언니는 대답했다.

  “뭐가 묻어서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언니의 교복 등 부분에는 형광펜으로 찍은 점이 가득했다. 수업 시간에 몇 애들이 언니의 뒷자리에 앉아 형광펜으로 등을 찌른 자국이었다. 언니가 펜으로 종이 위를 내리찍은 것처럼 아이들은 형광펜으로 언니의 등 위를 찔렀다. 그때마다 퍽퍽 소리가 언니의 몸 안에서 울렸을 것이다. 나는 심이 들어간 펜으로 이면지 위에 글자를 적는다. 언니는 떨어졌다. 

  언니는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어울리려고 다가갈수록 점점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언니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언니를 전염병 환자처럼 대했다. 격리했고 가까이 오면 흠칫했다. 가해 무리가 언니를 쉬는 시간에 화장실로 부를 때마다, 점심시간에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수업 시간에 교복 위에 낙서를 할 때마다 언니의 일기장 위에는 옴폭 들어간 점들이 생겼다. 언니는 그때마다 자신이 쥐고 있는 펜으로 일기장 위가 아닌 팔목을 찌른다면, 목을 찌른다면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방 안에 혼자 앉아 한 손으로는 머리칼을, 다른 한 손으로는 펜을 쥔 언니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불안했다. 그래서 언니가 없을 때 펜 대신 뭉툭한 연필을 가져다 놓고, 커터칼처럼 날카로운 물건을 숨겼다. 언니가 없는 방에 들어갈 때마다 내가 언니라면 어떻게 자살할지 생각했다. 뉴스에서 어떤 애는 태권도복 띠로 목을 매서 자살했다는데 언니라면 교복 넥타이로 목을 맬 수 있지 않을까? 목을 맨다면 어디에다가 매달지? 그 애는 어디에다가 매달았다고 나왔었지? 요즘엔 인터넷에서 쉽게 자살 도구 살 수 있다던데 언니도 알까? 나는 중요한 걸 찾는 사람처럼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자살 도구를 찾았지만, 그때마다 발견한 건 언니의 일기장뿐이었다. 일기장은 언니가 자주 웅크리고 있던 옷장과 침대 사이에도 있었다. 구석지고 빛이 안 들어오는, 답답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찾은 일기장에는 자살하고 싶다는 말이 없었지만 나는 일기장을 읽을 때마다 언니가 자살할까봐 불안했다. 언니가 밤늦게 부엌에 물을 마시려고 나오는 소리만 들려도 나는 자다가 놀라서 부엌으로 갔다. 언니가 부엌에서 칼을 가져가려고 했을 거야. 언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언니의 날카로운 물건을 숨겨놓거나, 일기를 몰래 읽거나, 벽에 기대 물을 마시는 언니를 보는 걸 언니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는 알았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다고 달라진 것은 없으니까. 방문을 잠그지 않아도 들어가는 사람은 없으니까.

  형광펜으로 낙서 된 교복을 벗으면 언니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새로  만난 사람들, 언니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린다면 언니가 책상 밑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니는 변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고 교복을 벗어도 언니는 책상 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언니는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동안은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밖에서는 웃음이 많은 아이인 척, 밝은 아이인 척했지만, 집에 들어오면 지친 얼굴로 책상 밑을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는 모든 사람이 가해 학생들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 언니는 다시 예민해졌고 날카로워졌다. 입을 열기보다 닫는 일이 많아졌다. 나서기보다는 웅크리고 숨어있기 바빴다. 언니는 대학에서 나와 다시 구석으로 들어갔다. 그런 언니에게 엄마와 아빠는 공무원 시험을 제안했다. 공무원은 회사원보다 상사나 동료와의 교류가 적을 거라는 게 엄마와 아빠의 생각이었다. 나는 그때 당연히 언니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언니라면 가해 학생이 아닌 피해자인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지 물어본 부모님의 말은 무엇이든 거절했을 것이다. 책상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엄마와 아빠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언니는 입을 열었다. 

  “시험 보면 뭐 해줄 건데?”

  아침에 언니는 나보다 먼저 준비를 끝내고 신발장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내가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운동화를 신을 때, 언니는 신발장 문에 있는 거울을 보고 엄마와 아빠가 사준 비싼 립스틱을 발랐다. 언니는 내가 학교에 가는 시간에 맞춰 집에서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나는 학교로, 언니는 학원으로 향했다. 출근, 등교 시간에 타는 지하철 안은 숨이 막혔다. 문 가까이에 서 있던 우리는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반대편 문에 몸을 문댔다. 밀고 밀리는 사람들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욕을 하고 그만 좀 밀라고 소리쳐도 밀지 않는 사람은 없고 도착지가 아닌 곳에서 내리는 사람은 없다. 그저 조용히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나도 그 사람들 틈에서 안내 방송에 집중하며 내려야 하는 역을 조용히 곱씹고 있었다. 이제 몇 정거장 남았지? 아직 멀었나? 이제 곧 환승역 아닌가? 얼굴과 머리 위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뜨뜻한 숨과 뒤섞인 향수와 로션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나와 달리 사십 대 아저씨의 어깨에 얼굴을 가까이 댄 언니는 편안해 보였다. 몸에 힘을 풀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언니는 잠을 자는 거처럼 보였다. 방 안, 책상 밑이나 옷장과 침대 사이에 앉아 바닥을 볼 때나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볼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학원으로 향하는 시간, 그 시간이 언니가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간이었다. 언니가 먼저 지하철에서 내리고 언니가 서 있던 자리에 내가 섰다. 언니가 얼굴을 대고 있던 아저씨의 어깨에는 립스틱이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이거 색깔 진짜 예쁘지. 발색도 그렇고 지속력도 좋대.” 

  언니는 책상 앞보다 새로 산 화장대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화장대 위에 화장품이 점점 늘어났고 언니는 새로 산 화장품이 생길 때마다 나를 옆에 앉혀놓고 떠들었다. 언니는 사고 싶은 화장품이나 가방, 옷이 생기면 책상 밑에 들어가 앉아 불쌍한 눈으로 엄마와 아빠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공부할 때마다 그 애들 계속 생각나. 이거 있으면 다 잊고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아.” 

  엄마와 아빠는 지갑을 열었고 언니는 말과 달리 과거를 잊지 못했다. 언니 방문 앞에 귀를 대고 있으면 퍽퍽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화장품을 손등에 바르고 예쁘지 않냐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넌 여자애가 왜 화장도 안 하고 다녀? 좀 꾸미고 다녀야지 애들한테 인기가 많아지지.”

  언니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라며 화장품 몇 개를 손에 쥐어 주었다. 언니는 일기장에 자주 ‘내가 예뻤다면 어땠을까’라고 썼다. 그 애들처럼 예뻤다면, 그 애들이 쓰는 화장품, 그 애들이 훔치라고 시킨 화장품을 썼더라면 왕따를 당하지 않았을까? 언니는 예뻐지고 싶었다. 예뻐지면 다시는 그때의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일기장에는 언니의 생각보다 언니가 사고 싶은 화장품과 옷이 적혀 있었다. 언니는 화장대 위 화장품이나 옷장에 걸어놓은 옷과 가방을 보며 웃는 일이 많아졌고 나는 그런 언니를 보며 내가 바란 예전 언니의 모습이 이런 걸까, 생각했다. 어쨌거나 웃는다면, 책상 밑에서 벗어났다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언니가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다.

  언니는 백화점에는 가지 않았다. 백화점에 가면 언니보다 예쁜,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언니는 그런 사람들을 견디지 못했다. 언니는 인터넷으로 화장품을 샀다. 집에는 택배 박스가 늘어났다. 언니는 학원에 가는 날이면 평소보다 세 시간은 먼저 일어났다. 여자애라면 머리부터 화장까지 할 때 그 정도 시간은 당연히 걸린다고 했다. 언니는 절대 이틀간 같은 옷을 입지 않았다. 인터넷이나 잡지를 뒤적거리며 유행하는 화장법을 찾아 하나씩 해봤다. 언니의 화장품과 옷이 늘어날수록 엄마, 아빠는 자주 한숨을 쉬었다. 

  “은진아, 화장하는 것도 좋은데 시험 얼마 안 남았으니까… 시험 합격하면 아빠가 더 좋은 거로 사주신대.” 

  “내가 또 그런 일 겪었으면 좋겠어? 예쁘게 낳아주면 바라지도 않아.”
언니는 빨간 립스틱을 칠한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엄마, 아빠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때쯤 언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한심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다니면 애들이 안 놀아주지 않아? 내가 준 화장품은 쓰니? 하긴 몸이 그러면 화장해도 소용없겠다. 너, 살쪘지? 저기 체중계 위에 올라가봐. 제정신이야? 이런 데 다이어트  할 생각이 아직도 없어? 고등학생 때 살찌기 쉽다고 누가 그래? 그럼 날씬한 애들은 왜 있어? 너 그러다 왕따 당해. 왕따 당하고 싶어?”

  언니는 일기장 속 가해 애들과 비슷해져 갔다. 일기장 속 언니는 그 애들이 싫고 밉고 무서웠다. 하지만 부럽기도 했다. ‘나도 그런 위치에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욕을 하고 심부름을 시키고 무안을 줄 수 있다면.’ 언니에게 있어서 나와 엄마 아빠는 만만하고 건드려도 아무 말 못 하는, 쉬운 애였다.

  언니는 두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다. 언니는 시험에서 떨어져서 우울하다며 엄마 아빠에게 집 근처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외식하러 가자고 했다. 레스토랑의 몇 없는 아르바이트생들은 언니 또래였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았다. 주문을 몇 번이나 확인했고 음식을 가져와도 하나씩 빼 먹었다. 언니는 그런 아르바이트생에게 화를 냈다. 머리가 멍청한 게 아니냐고, 왜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은진아, 그만 화 풀자. 실수잖아.” 

  “그래, 아빠 말대로 화 풀고 밥 맛있게 먹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엄마랑 아빠는 얘네 편이야? 또 내 편 안 들어? 이것도 내 잘못이야? 그때랑 똑같아.”

  언니가 엄마와 아빠에게 말을 쏟아붓자 아르바이트생과 점장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언니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언니는 화장대 앞 의자에서 책상 앞 의자로 옮겨 앉았다. 하지만 언니의 책상 위에는 문제집 대신 노트북이 올려져 있었다. 언니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엄마가 준 입학 선물이었다. 언니는 그 노트북으로 리포트 한 장 써본 적이 없었다. 언니는 아빠 카드로 충전한 포인트로 영화나 드라마를 다운 받았다. 언니는 밤새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봤다. 언니가 보는 드라마나 영화 속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못된 짓을 하고 나중에 후회하며 주인공에게 울면서 사과했다. 언니는 주인공이 너무 쉽게 용서를 해주거나 애초에 사람들이 사과하자마자 받아주면 그 드라마의 파일을 삭제해버렸다. 사람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사과가 나오고 겨우 주인공이 용서를 해주면 언니는 그 드라마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언니는 내게 ‘너 어차피 할 거 없지? 이거나 봐’라며 파일을 보내줬다. 언니가 추천해준 드라마를 볼 때면 나는 괴로웠다. 괴로울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스토리는 한 작가가 쓴 거처럼 비슷했고 내용의 틀도 똑같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사과할 정도로 잘못한 건가 싶고 어차피 용서해줄 주인공이 질질 시간을 끄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기억에 남는 건 눈물 콧물 쏟으며 못생기게 우는 사람들이 하는 사과였다. 그래서 나중엔 드라마를 보지 않고 언니에게 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이 들통나면 언니는 자신이 왕따 당해서 무시하는 거냐고 화를 냈다.

  “나, 이제 병원 다니기 싫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나 이상하게 쳐다본다고. 내가 이상해? 엄마는 병원 안 다니잖아. 근데 내가 왜 다녀야 해?” 

  “엄마는 너 생각해서…….” 

  “됐어. 난 안 다닐 거니까 알아서 해. 엄마가 다니던가.”

  언니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날이 많아지자 나는 더 이상 날카로운 물건을 숨기지 않았다. 언니가 밤늦게 물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나가도 걱정하지 않았다. 왜 밤늦게 돌아다녀서 잠에서 깨게 만드는지 화가 나기만 했다. 문제집을 책상 한쪽에 쌓아놓고 드라마를 보는 언니를 볼 때마다 답답했다. 언니가 일기를 쓰든, 펜으로 종이를 내리찍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어차피 자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일 때문에 집에 없고 언니는 학원 수업이 없어 집에 혼자 있어서 언니와 둘이 점심으로 뭘 먹을까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아파트 앞에 몰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무언가를 둥그렇게 감싸고 서 있었다. 구급차와 경찰차에서 내린 남자들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지나가던 엄마들은 아이의 눈을 가린 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내 또래 남자애들은 몰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왜 우리 집 앞이지? 차에 치였나? 칼에 찔렸나? 아니면… 고개를 들어 19층인 집을 올려다봤다. 떨어졌나? 

  언니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지만, 공부를 한 흔적은 없었다. 시험에서 떨어지자 그때까지 공부했던 문제집은 부정 타서 안 된다며 새로 산 문제집들이었다. 문제집 위에는 이응이나 미음이 연필로 색칠되어 있었다. 언니의 눈은 책상 위에 있는 창문에 향해 있었다. 숨을 고르며 언니를 부르자 언니는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언니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언니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나와 눈을 마주 쳐다봤다. 

  “은선아, 위에서 어떤 애가 떨어졌어.” 

  “봤어?” 

  “기지개 켜면서 창문 보고 있는데 갑자기 뚝 떨어졌어. 근데 나… 그 애 한 시간 전쯤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본 거 같아. 하고 있던 머리띠가 빨간색이었는데 그 애가 떨어질 때 빨간 게 보였거든. 엘리베이터 같이 탔는데 애가 20층 버튼 누르더니 막 우는 거야. 처음 보는 앤데 왜 우냐고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고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19층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어. 근데 내가 내리고 문 닫힐 때 걔가 저기요, 하고 나 부른 거 같아. 은선아, 나 뒤 안 돌아봤어.” 

  “언니… 괜찮아?” 

  “나는 괜찮은데 떨어진 애가 안 괜찮겠지. 그 애는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급식 받아오면 애들이 식판 위에 침 뱉었나? 하고 싶은 게 없나? 시험공부 너무 힘든데 이게 아니면 할 거 없으니까 억지로 해야 했나? 못생기진 않았어. 예쁘장하게 생겼던데… 그럼 왜 떨어졌지? 부를 때 내가 뒤돌아봤으면 안 떨어졌을까?”

  언니는 중얼거리더니 내게서 눈을 돌려 창문을 쳐다봤다.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고 눈부셨다. 큰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그 애는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

  언니의 눈에 잠깐 생기가 돌았다. 

  아파트에서 떨어진 애는 집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삼 수험생이었다. 성적은 계속 떨어지고 부모님은 성적표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선생님은 관심조차 주지 않던 아이였다. 특이할 거 없는 아이였고 곧 잊힐 아이였다. 그때 모여 있던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걱정했고 슬퍼했고 불쌍해하다가 또 그렇게 다른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며 CCTV를 설치하자고 했다. 하지만 CCTV를 설치할 때 드는 돈, CCTV를 관리할 사람, 경비원들의 늘어나는 일, 늘어나는 관리비는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이 원망으로 변하기 쉽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값이 내려갈 거라며 걱정했다. 점차 아이는 잊혔고 일기장 속 언니만은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거긴 어때? 거기 있으면 진짜 다 잊을 수 있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어? 예전에 학교에서 자살 예방 교육한 적 있어. 그때 학교에 온 교육 선생님이 자살해도 그 고민은 끝난 게 아니라고, 만나고 싶은 가족이나 친구들 영원히 볼 수 없다고 했었어. 근데 그 선생님은 살아있으니까 모르는 거잖아. 죽으면 그 고민이 끝날 수도 있는 거잖아. 편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만나고 싶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죽어도 괜찮은 거 아닐까? 너는 죽었으니까 알 거 아냐. 그니까 대답해줘. 거긴 어때? 학원에서 자살방조죄라는 걸 배운 적이 있어. 내가 널 엘리베이터 안에서 말렸어야 했을까? 왜 우냐고 물어봤어야 했나? 만약에 내가 그랬어도 무언가 달라졌을까? 

  언니는 일기장에 그 애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그 애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일기장은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죽은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언니는 다시 구석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또 떨어졌다. 

  언니는 떨어지기 전날, 일기를 썼다. 언니는 학원에서 남자애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애의 책상 위에 음료수를 올려놓는 것과 친해진 애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을 자주 봤다. 아무도 언니에게 음료수를 건네거나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없었다. 언니는 혼자였다. 음료수를 받거나 무리의 중심에 있는 애들은 언니가 보기엔 예쁘지 않았다. 평범했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과거의 언니와 닮아 못생겨 보였다. 그런데 왜 인기가 많지? 언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왕따 당한 이유가 못생겨서가 아니야? 그럼 왜? 이유는 처음부터 없던 건가? 그럼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언니는 떨어졌다. 

  나는 이면지 위에 쓰인 문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참을 내려다봐도 다음 문장을 쓸 수가 없다. 언니는 죽었다. 나는 언니가 떨어진 걸 보지 못했지만, 언니가 어떻게 떨어졌을지 상상할 수 있다. 언니는 두 팔을 벌린 채 서서 뒤로 떨어졌을 것이다. 방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언니는 떨어져서 죽었다. 그게 전부다. 누군가의 유서를 대신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리 언니의 일기를 몰래 읽어도 언니와 오래 붙어있어도 언니를 모르겠다. 언니의 노트북을 내 앞으로 끌어놓고 전원을 켰다. 노트북 화면에 불합격이라는 빨간색 글씨가 떠오른다. 언니는 떨어졌다. 언니는 한 걸음으로 떨어졌다. 한 걸음으로 삶에서 물러났다. 위험하오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언니와 내가 수십 번 지하철을 타면서 들었던 안내 방송이 귓가에 맴돈다. 언니에게 위험한 곳은 어디일까. 언니가 물러나길 바란 사람은 누구일까. 일기장에서, 말투에서, 행동에서 언니는 내게 ‘저기요’라고 부른 게 아닐까. 그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나. 나는 언니의 삶에서 물러났다. 언니는 떨어져 버렸다. 

  나는 이제 언니가 입던 교복을 입는다. 같은 반 아이들은 내가 음침하다고 수군거리며 피하고 나를 괴롭히는 무리가 정해졌다. 그 무리 애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언니에 대한 일을 들먹였다. 

  “네 언니, 미쳐서 자살했다며?”

  그 애들은 생각 없이 말했다. 아니, 어떻게 하면 내가 반응할지만 생각하는 거 같았다. 내가 왕따를 당한다는 건 엄마 아빠는 모른다. 평생 숨길 것이다. 부모님이 알아도 결과는 같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조만간 내게도 엄마 아빠는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을 것이다.

  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언니가 떨어지기 전에 나는 자주 이렇게 생각했다. 애들이 옆으로 지나가면서 침을 뱉을 때, 얼굴이나 팔다리처럼 눈에 보이는 데 말고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을 발로 찰 때, 팔다리를 붙잡은 채 얼굴 위로 엉터리 화장을 해놓을 때, 물로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그 얼굴로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이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빨리 끝나기를 조용히 곱씹을 뿐이었다. 

  언니의 방은 그대로다. 아무것도 치우지 않았다. 언니의 방 안에 있으면 언니가 갑자기 방 안으로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책상과 언니가 누워 베개를 배 위에 올리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드라마를 보던 침대, 일기장에 써 놓은, 사고 싶은 물건들을 넣어둔 옷장. 나는 언니의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학원에서 자살방조죄라는 걸 배운 적이 있어.’ 

  언니가 남긴 이면지에는 자살방조죄에 대한 문제가 많았다. 언니의 유서를 쓰려고 했던 이면지 뒷면에도 자살방조죄 문제가 있었다. 언니는 그 문제를 틀렸다. 언니는 다른 문제는 풀지 않아도 그 문제는 풀었다. 맞은 문제는 몇 개 없었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떨어지고, 나는 언니가 쓰던 일기장을 이어서 쓰고 있다. 침대 위에서 일어나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책상과 벽 사이 틈에 껴 있는 일기장을 꺼냈다. 

  거긴 어때? 궁금증은 풀렸어? 이제 좀 편해? 거기서는 화 잘 안 내지? 언니는 여기서의 기억을 다 잊었을까? 살아있는 우리는 하나도 잊지 않았어. 엄마랑 아빠는 이사 안 가기로 했어. 언니의 마지막 흔적도 있고 여기서 떠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하나봐. 대신 언니 방 커튼을 쳤어. 밤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언니가 방에 있을 때는 커튼을 안 쳐서 멀리 있는 아파트 조명이라도 보였는데. 언니는 책상 밑에 있어서 그 조명도 안 보였겠다. 결국, CCTV를 달았어. 옥상 문은 자물쇠로 걸어 잠갔고. 언니랑 그 애는 집에서 죽었는데 무슨 상관인가 싶어. 사람들이 많이 이사 갔어. 엄마랑 아빠는 눈치 보는 거 같아. 아무도 우리 인사를 받아주지 않거든. 나는 괜찮아. 요새는 누군가가 멀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막상 당해 보니까 형광펜으로 찌르는 건 아프지 않더라. 기분만 더럽지. 언니 화장품이랑 옷은 안 건드렸어. 영화에서 본 것처럼 태워야 할지 고민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말리더라. 돈이 아까워서 그러나 싶었는데 내가 손대는 것도 싫어해. 계속 그대로 둘 건가봐. 별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지만. 만약에 시간이 지나서 엄마랑 아빠가 언니 물건을 써도 된다고 하면 무서울 거 같아. 그렇게 되면 엄마랑 아빠가 나를 언니처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 엄마와 아빠에겐 우리가 같은 사람인 걸까? 또 반복하는 거야. 언니처럼 애초에 없던 이유를 찾으려고 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실패하는 삶을 살고 불행하고 스스로 삶에서 물러나고. 언니,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아. 여기서 물러나고 싶지 않아. 언니는 정말 죽고 싶었어? 

  일기장을 덮었다. 죽은 언니는 아무 말이 없다. 

  내가 엄마, 아빠한테 언니 일기장을 보여줬더라면, 언니에게 살갑게 대했다면 언니는 나대신 여기에 앉아있었을까? 그럼 나는 어디에…….

  숨이 찼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하철을 놓치면 이십 분은 넘게 기다려야 했다. 지각하면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전화를 할 거고 부모님은 지친 얼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늘 하던 말을 할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힘든데 너까지 이럴래?”

  사람들은 도착해 있는 지하철을 타려고 뛰고 있었다. 내 앞에는 불룩 튀어나온 배낭을 멘 할머니가 배낭을 뒷짐 진 손으로 받치며 뛰고 있었다. 멀리서 도착한 지하철 문이 열리고 있었다. 지하철에 꽉 찬 사람들은 아무도 내리지 않았고 승강장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지하철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나는 겨우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문 쪽으로 돌아섰다. 지하철 문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데 할머니가 불쑥 내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할머니가 멘 배낭이 내 배를 눌러왔다. 앞뒤로 몸을 눌러대자 숨을 쉴 수 없었다. 사람들이 뒤에서 미는 힘에 할머니의 몸이 지하철 문에서 나갔다. 그때 할머니가 문에 낀다면, 지하철이 그대로 출발한다면, 놀란 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면, 할머니가 죽는다면. 그건 내 잘못일까? 할머니는 툴툴거리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지하철 문이 닫혔고 할머니는 배낭을 고쳐 메며 나를 노려봤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과 머리 위로 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 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몸을 돌렸지만, 호흡은 진정되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했는데, 물러나라고 했는데도 뛰어들었어. 그날, 내가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에 왔다면, 도서관에 들르지 않았다면, 베란다 난간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던 언니를 잡을 수 있었을까?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도착한 나는 불안할 정도로 조용한 집안을 들여다보다가 언니 방으로 향한다. 언니는 베란다 난간 위에 서 있다. 언니는 두 팔은 벌린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나는 멈칫하다가 소리를 지르며 언니의 한쪽 팔을 잡아당긴다. 아니, 잡아당겼다고 생각한다. 언니는 내 손을 뿌리친다. 그리고 밑으로 떨어진다.
아무도 언니에게 위험하니까 물러서라고 하지 않았다. 언니는 위험하다고 말해 줄 사람이 없을 때 떨어졌다. 언니는 내가 말려도 떨어지려고 했을 거야. 기침이 토해져 나오기 시작했다. 멈춰지지 않았다. 

  “학생, 괜찮아요?”

  고개를 돌리자 회색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 부분에 분홍색 립스틱 색이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서점에서 언니의 학원 수업이 끝나는 걸 기다릴 때가 많았다. 글을 읽기보다는 그림책 속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아직도 그 서점이 남아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보다 창밖을 자주 봤다. 지나가는 사람과 떠도는 개와 뽑기를 파는 아줌마를 봤다. 깨끗한 시험지에 그들의 이야기를 썼다. 아직도 그 시험지가 남아있다. 매일 지하철에 4시간 갇혀 있다. 지하철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꽤 오랫동안 소설 속 언니와 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아직도 내가 타는 지하철엔 그들이 남아있다. 소설의 언니처럼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준 심사위원분들과 선생님, 가족,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 글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묵묵히 계속 쓰겠다. 

 

  이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창작상에 응모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 폭과 세계의 다양함에 감탄했다. 우리 소설의 미래가 바로 이 폭과 다양성에 달려 있다. 최종적으로 ‘종말직전의 인간’, ‘나타났다! 와쇼스키’, ‘밤의 산책’,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를 두고 고심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는 촘촘한 서사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탁월한 작품이다. 표제를 비롯한 인상적인 문장들을 이야기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서사 속 밀도를 높인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서사를 직조하는 문장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가해자/피해자의 구도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있어서, 윤리적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소설 속 인물들이 품고 있는 비밀이 무지, 비통, 절망의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이 세계의 심연이기도 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를 최우수작으로 선정한다. 


[01811] 서울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 최초발행일 1963.11.25 I 발행인: 김동환 I 편집장: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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