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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 발전의 결정적 장면과 그 특성
기사 승인 2019-05-18 01  |  617호 ㅣ 조회수 : 1940



1.머리말



  지난 4월 15일, 우리대학은 개교 109주년을 맞이하였다. 내년의 개교 110주년을 앞두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110년사』를 편찬하기 위해 “110년사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현재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대학의 역사가 110년이나 되었다고 하면, 최근에 우리대학의 구성원이 된 교수, 교직원이나 학생들은 우리대학의 역사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대학은 설립 초기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등장하지 않았다. 아래와 같은 지난한 학제의 변경과 승격을 통해 오늘날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한마디로 우리대학의 역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어서 공학 및 실사구시 교육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되어 국가 및 사회에 기여하였고, 또한 교수 및 교직원의 헌신이 함께 하였다. 다음과 같이 우리대학 발전의 역정의 과정을 일곱 장면에 걸쳐 살펴봄으로써 ‘법고창신’의 새로운 기상과 웅지를 되새기고자 한다.



2.우리대학 발전의 결정적 장면



1) 아현동캠퍼스로의 이전(1931)



  ‘어의동’이란 명칭을 학교명에 붙이고, 독립된 교사가 없이 기존 보통학교에 부설된 방식으로 설립되었던 우리대학이 처음으로 획기적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1931년 ‘경기도 아현리’로의 캠퍼스 이전이었다. 이 캠퍼스는 1931년 이 해에 폐교된 경기도공립사범학교 부지였다. ‘경기도공립사범학교’에 등장한 ‘경기’의 명칭은 이후 아현동캠퍼스에서 학제를 변경해 가면서 승격하고, 발전하던 우리대학 명칭의 서두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캠퍼스 이전뿐만 아니라, 기존 학교를 경성공립직업학교(1931~1944)로 개칭함으로써 정규 공업교육기관으로의 승격까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리대학의 발전과정에서 최초로 맞이한 결정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발판으로 공립직업학교의 특성을 발휘하던 우리대학은 일제말기에 경기공립공업학교(1944~1945)로 개편하였다. 이 교명의 ‘경기’는 이후 1988년에 ‘서울산업대학’의 명칭이 등장할 때까지 경기공립공업중학교(1945~1953), 경기공업고등학교(1953~1963),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1963~1974), 경기공업전문학교(1974~1979), 경기공업전문대학(1979~1982), 경기공업개방대학(1982~1988) 등의 명칭에 존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우리대학은 1910년 4월 15일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의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의 위치는 지금의 종로구 효제동 효제초등학교 자리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는 당시 공립어의동보통학교에 부설되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효제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서울시 효제동 255-4 일대’가 우리대학의 최초 설립위치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1910~1912), 공립어의동간이공업학교(1912~1922), 공립어의동공업보습학교(1922~1928), 공립어의동공업실수학교(1928~1931)의 교명으로 존속하였다.



2) 5년제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1963)과 국립화(1968)



  5년제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는 5·16이후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요구되는 공업 기술인력의 수급과정에서 탄생하였다. 공업고등전문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의 보통교육과 대학의 전문교육이라는 두 가지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문적 기술교육을 시행하는 교육기관이었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질적으로 담당할 대량의 유능한 공업 기술자 육성이 필요했던 점, 중급 기술자 양성기관으로서 가장 적합한 것이 공업고등전문학교 제도라는 점, 영국·프랑스·일본 등에서 이미 이와 유사한 교육제도가 실시되고 있다는 점 등이 5년제 공업고등전문학교의 도입배경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수많은 실업계 고등학교 가운데 ‘경기공업고등학교’가 새로운 제도인 공업고등전문학교를 도입하기 위한 학교로서 선정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이미 1957년 6월에 당시로서는 국내최대 규모 및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춘 실습공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경기공업고등학교’의 위상이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대학은 1910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제 개편 및 승격을 통해 우리대학이 도약해 갈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제3공화국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계속 추진해 가면서 경제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경제력의 성장과 공업기술의 고도화에 부응할 수 있는 기술 인력에 대한 수요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1968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3411호에 의해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의 ‘국립화’로 반영되었다. 우리대학이 지금에 이르러 국립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위상을 갖게 된 국립과 고등교육기관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이 시기에 구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가 설립된 1963년부터 1982년 4년제 ‘경기공업개방대학’으로의 승격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대학 발전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경기공전’시대가 전개되었다.



3) '경기공업전문학교'(1974)와 '경기공업전문대학'(1979)으로의 승격



  경제성장과 산업발달이 계속 이루어지는 가운데 공업기술의 고도화가 요청되는 1970년대의 시대상황 속에서, 우리대학은 2년제 ‘경기공업전문학교’(1974~1979)와 ‘경기공업전문대학’(1979~1982)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경기공업전문학교’는 기존의 5년제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의 교육기간이 너무 긴 탓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함에 따라 학제개편의 필요성이 처음부터 요구되었다. 학생생활지도상의 문제, 중도탈락생의 증가, 교육시설 활용의 혼란, 졸업생의 취업과 진학에 따르는 불균형의 심화 등의 문제가 상존하였다. 그리하여 고교과정인 3년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2년의 대학과정을 신설하는 교육법의 개정 법률안이 1970년 1월 1일 법률 제2175조로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5년제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를 폐지하고, 2년제 ‘경기공업전문학교’를 신설하게 되었다.



  2년제 ‘경기공업전문학교’의 설립 목적은 교육법 128조 6항에 보듯, “사회적 분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이론을 교수·연구하며 재능을 연마하여 국가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중견 직업인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공업전문학교는 이러한 전문기술교육을 2년에 걸친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실시하여 중견 기술인을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졸업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를 입학자격으로 하고 2년간에 걸친 기술교육에 중점을 두어 전문교육을 실시하였다.



  궁극적으로 공업전문학교가 목표로 했던 것은 2년의 단기간에 걸쳐 일반 공업대학 4년간의 기술교육과 대등한 성과를 달성하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전문과목 위주의 교육과정으로 편성하여 이론과 실기가 완전 일치된 교육방법으로 광범위한 기술 분야에 걸친 전공 부문별 집중 교육을 실시하였고, ‘경기공업전문학교’는 다수의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때마침 경제성장이 거듭됨에 따라 1차적인 산업발달의 단계를 넘어 고도산업화 단계로 진입해 가는 사회경제적 추세가 전개되면서 기술의 고도화가 요구되었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요구되던 단순한 공업기술이 아니라 기술의 고도화를 담당할 중견기술인 또는 전문기술인을 배출할 수 있는 보다 체계화된 공업교육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 발맞추어 공업교육 및 실업교육의 전반적인 체제를 재정비하려는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2년제 ‘공업전문대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1977년 12월, 교육법 제3054조로 전문대학 설립규정이 마련되고, 1979년 1월 1일부터 127개의 전문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미 2년제 ‘공업전문학교’를 통해 실질적으로 4년제 공업대학의 성과를 달성해 오던 우리대학은 1978년에 ‘공업교육선도연구대학’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에 이르러 ‘경기공업전문대학’으로 승격·개편되었다. 곧바로 우리대학은 공릉동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획기적인 교육여건의 확충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이룩하게 된다.



4) 공릉동캠퍼스로의 이전(1980)과 4년제 '경기공업개방대학' 설립(1982)



  우리대학의 110년 역사에서 소중하지 않은 시기나 사건이 없지 않겠으나, 무엇보다 획기적인 도약의 계기는 1980년 공릉동캠퍼스로의 이전과 1982년 4년제 ‘경기공업개방대학’ 설립이었다.



  당시 공릉동캠퍼스는 대지 521,234.7㎡(157,980평), 연건평 69,001.9㎡의 규모였다. 마포구 아현동 283번지에 자리 잡은 경기공업전문대학의 아현동캠퍼스는 대지 30,306㎡, 연건평 16,851㎡ 규모였다. 아현동캠퍼스에 비해 면적은 약 17배, 연건평은 약 4배가 되었다. 원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자리 잡고 있던 이 캠퍼스는 서울대학교캠퍼스종합화계획에 따라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계획에는 공릉동캠퍼스도 종합화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은 1975년부터 1979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당시 이 캠퍼스를 어느 교육 기관이 인수하여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 주요 관심사였고, 결과적으로 우리대학이 여기에 이주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대학은 향후 대학 발전에 획기적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1980년을 전후로 한 이 시기는 유신체제가 종막을 고하고 제5공화국 정부가 출범하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특히 교육적 측면에서 보면 경제성장 및 산업발달에 따른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한 재수생의 증가는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었다. 제5공화국 정부는 1980년 ‘7·30 교육정상화 및 과외해소 방안’을 통해 누적되어온 교육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방향은 그동안 억제해 온 고등교육기관과 시설을 신설, 개방, 확대하는 것이었다. 본고사 금지, 졸업정원제 실시와 대학입학정원 확대, 신규대학 설립, 단과대학의 종합대학화, 방송통신대에 학사과정 신설, 교육대학의 4년제 개편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교육문제의 해결책과 함께 평생교육의 이념에 따른 ‘개방대학’ 제도 도입도 그러한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개방대학’의 주요 내용은 학력의 제한 없이 입학하고, 졸업연한도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사회 활동을 하면서 대학 과정을 이수하게 하며, 일정한 학점과 자격 요건을 취득하면 일반대학 졸업자와 동등한 학사학위를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집권세력인 민정당은 평생교육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정부측과 협의를 거쳐 교육법을 개정하며 우선적으로 국립 전문대학 1개교를 개방대학으로 개편, 시험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여기에 해당하는 ‘1개교’가 바로 경기공업전문대학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평생교육의 개념이 등장하였고, 결국에는 제5공화국 헌법 제29조 5항에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평생교육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경기공업전문대학을 ‘개방대학’화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대학은 1982년 3월, 공릉동캠퍼스를 바탕으로 4년제 ‘경기공업개방대학’으로 도약해 갈 수 있었다. 당시 캠퍼스의 이전 및 4년제 개방대학의 출범을 앞장서서 이끌어간 초대학장은 홍순철 박사(재임: 1982. 3 ~ 1983. 2)였다.



5) '서울산업대학'(1988)과 '서울산업대학교'로의 교명변경(1993)



  우리대학은 기존의 교명을 1988년 3월 1일 ‘서울산업대학’, 그리고 1993년 3월 1일 ‘서울산업대학교’로 각각 변경하였다. ‘교’의 한 글자가 덧붙여지긴 하였으나 이후 22년간 ‘서울산업대’란 이름이 우리대학을 상징하는 호칭이 되었다.



  교명 ‘서울산업대학’은 ‘경기공업개방대학’의 ‘개방’ 삭제 운동으로 인해 변경되었다. ‘개방대학’은 제5공화국 정부에 의해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었으나 당시의 사회적 풍토와 여건이 이러한 새로운 고등교육 시스템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고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개방대학 설치운영 규정’이 그대로 존속함에도 불구하고, 문교부는 개방대학 출범이후에 계속된 개선 요구에 따라 일단 대학 명칭을 고치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서울산업대학’으로의 교명 개칭이후에 산업대학원 개원, 학과의 신설과 확장이 계속 이루어졌고, 1992년 말에는 6개 학부(제1공학부, 제2공학부, 제3공학부, 제4공학부, 조형학부, 인문사회학부)에 29개 학과가 운영되었다. 1991년에는 교수들의 직선제 투표로 제4대 학장을 선출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5년간 존속하던 ‘서울산업대학’이 ‘서울산업대학교’로 바뀐 것은 여러모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학교장의 명칭은 ‘학장’에서 ‘총장’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우리대학은 외형상의 대학체제가 타 일반대학과 유사하게 되면서 종합대학체제의 대학교육을 전개해 갈 수 있게 되었고, 또 다른 대학발전의 열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서울산업대학교’ 시기에 우리대학구성원들은 법적 제약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외부의 덕망이 뛰어난 인물을 영입하여 직선 총장으로 선출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최동규, 이진설, 이희범, 윤진식, 노준형 등 5대 연속의 외부영입 총장들이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하고 우리대학구성원들 또한 이에 협력하여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우리대학은 마침내 법적 차별을 극복하고 일반종합대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22년간 불려진 ‘서울산업대’란 호칭이 우리대학의 한계를 의미한 것이었으나, 주어진 한계 하나하나를 돌파하면서 마침내 일반종합대를 구축한 자랑스러운 호칭이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6)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의 교명변경(2010)과 일반대 전환(2012)



  우리대학의 현재 교명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는 2010년 9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교명변경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일반대학으로의 전환계획 때문이었다. 2008년 2월, “산업대학이 산업체 근로자의 평생교육 및 재교육을 담당하는 등 산학협력 인력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으나, 교육환경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반대학과의 차별성이 약화되고, 산업대 지원 기피, 재학생의 사기 저하, 고등교육 재정지원 사업 소외 문제 등이 제기됨에 따라 산업대학을 일반대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성”(의안번호 178278, 2008. 2. 26)을 담은 고등교육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우리대학은 일반대학으로 전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일반대학에서는 대학 유형을 표시하는 ‘산업대학’ 명칭을 교명에 포함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교명변경은 일반대학으로의 전환 분위기, 법령상 불가피하게 산업대학 명칭을 제외해야 되는 상황, 그리고 2010년에 맞이할 개교 100주년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대학에 남아 있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대학구성원들의 열망 등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교명변경은 2008년 5월, 교명변경 기본계획이 수립되고 이어 6월에 교명변경위원회가 구성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 교명변경이 이루어지기까지 이미 2004년 10월에 “서울산업대학교의 미래와 달라진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을 찾자”라는 취지하에 교명변경 작업이 이루어진 바 있었다. 당시의 변경방식은 최종후보안 하나를 확정한 뒤, 이를 현재의 교명인 “서울산업대학교”와 함께, 선호도 조사를 통해 최종 교명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선호도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교명인 ‘서울산업대학교’ 54.4% 찬성, 최종후보안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45.6% 찬성으로 되어, ‘서울산업대학교’ 명칭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4년 전의 이러한 경험은 새롭게 교명변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특히 변경방식을 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간담회, 학생면담, 공청회, 인터넷 투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 수렴을 하는 과정은 4년 전과 비슷하였으나, 이번에는 교명 후보를 3개로 압축한 뒤, 후보안 가운데 하나를 총장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2008년 5월 16일, 교명변경 기본계획이 수립된 뒤, 2008년 12월 4일, 3개 교명후보로 한국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대학교가 확정되었다. 2009년 3월 18일, 이 가운데 ‘한국대학교’를 최종 후보로 확정하고, 교육과학기술부에 교명변경 승인 요청을 하였다. 그런데 한국대학교는 이미 공주대학교도 새로운 이름으로 신청한 명칭이어서 교육과학기술부가 승인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2009년 10월 19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명칭이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결정을 유보한다는 통보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대학은 2009년 12월 2일, 일반대학으로의 전환 시점, 개교 100주년 등을 고려하여 교명 후보 2순위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새로운 교명후보로 확정하고, 2009년 12월 22일, 교과부에 교명변경 승인 요청을 하였다. 마침내 2010년 8월 16일, 교명변경 내용을 담은 “국립학교 설치령 개정령(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고, 이어 8월 25일 이 안이 공포됨으로써 우리대학은 2010년 9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우리대학은 11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4년제 대학으로만 4차례 교명변경을 하였다. 이 교명에 당시 대학구성원들의 대학발전에 대한 열망과 확고한 의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2010년에 이루어진 교명변경은 우리대학이 일반대학으로 도약하기 위한 대전환의 거대한 흐름과 더불어 전개되었다. 요컨대 우리대학은 2010년 9월 1일의 교명변경에 이어, 2011년 8월 29일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일반대학 전환에 대한 승인 통보를 받고, 마침내 2012년 3월 1일 일반대학으로 새롭게 개교하였다.



  우리대학은 1910년 4월 15일에 개교한 이래 학제변경을 거듭하며 도약해 오다가, 1982년 ‘경기공업개방대학’으로 승격하여 개방대학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산업대학’, 1993년 ‘서울산업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 우리대학은 ‘산업대학’의 일원으로서 우수 산업인력 양성과 산업체 근무근로자, 실업고교 졸업자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부여해 왔다.



  그러나 경제 발전이 고도화되고 대학진학률 증가 등 교육 및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다수의 일반대학과 산업대학은 직업교육 및 산업기술 인력의 양성이라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고등교육법에 명기된 ‘산업대학’이라는 법적인 고유기능이 소멸되면서 일반대학과의 차별성이 약화되었다. 사실상 산업대학과 일반대학이 경쟁하는 상황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대학은 산업대학에 대한 사회적 편견, 재학생의 사기저하, 고등교육의 재정지원사업의 소외 문제 등을 계속 안고 있었다. 결국 산업대학의 고유 기능과 역할 퇴색, 대학의 자율화와 경쟁심화, 부당한 제도 극복과 공정경쟁의 틀 마련, 인구통계적 변화와 입학자원의 감소, 그리고 대학의 긍정적 이미지 구축이라는 요인 등이 더 이상 산업대학으로 존속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대학을 일반대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마련 및 입법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도 계속 제기된 바 있었다.



  ‘산업대학’에 부여된 법적 규제와 차별을 없애기 위한 일반대학으로의 전환 노력은 사실상 ‘산업대학’이 출범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시도와 노력도 여러 차례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8년 2월 26일 일반대학으로 전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는 고등교육법 일부개정 법률안의 국회 통과였다. 그러나 이 법률안은 3년의 기간 안에 전환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한시법이었다. 교수확보율 61% 이상, 산학협력에 보다 특성화된 대학체제로의 전환, 그리고 수도권정비계획법 시행령 개정 등의 요건을 3년 내에 충족해야 했다.



  당시 교수확보율이 51%였는데, 이를 단기간에 10% 이상 늘리기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2008년은 세계경제가 금융위기를 맞이한 해여서 공무원정원이 동결되어 있었다. 다행히 노준형 총장을 비롯한 집행부가 전력을 기울인 결과 29명의 교수를 배정받아 교수확보율 기준을 맞출 수 있었다. 3대 요건 외에도 여러 요구를 교육과학기술부는 계속하였고, 우리대학은 유사학과를 통합하여 대과 중심의 대학체제 계획안을 제출한 뒤, 2011년 4월에 조건부로 일반대학 전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침내 우리대학은 2011년 8월 수도권정비법 시행령이 개정된 후 최종승인을 받았다.



  개교 110년을 맞이하는 2020년의 시점에서 우리대학의 역정의 과정을 되돌아볼 때, 2010년의 교명변경과 2012년 일반대학으로의 전환은 우리대학의 발전과정에서 참으로 결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두 장면은 사실상 하나의 장면으로서 서로 맞물려 이루어졌고,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대학구성원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낸 쾌거였고, 이러한 경험은 일반대학 전환이후 어떠한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소중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7)대학 평가 순위의 획기적 도약(2018)



  우리대학은 ‘2018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종합 19위에 올랐다. 평가에 참여한 지 처음으로 10위권에 진입하였고, 국립대학으로서는 부산대에 이어 2위를 기록하였다. 우리대학은 2012년 일반대학으로 전환한 그 해에 처음으로 이 중앙일보 대학평가에 참여하여 32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후 매년 평가에 참여하여 20위권에 머물렀으나 이번에 10위권에 진입한 것이다.(2012년 32위, 2013년 23위, 2014년, 20위, 2015년 23위, 2016년 23위, 2017년 21위)



  중앙일보 대학평가는 1994년부터 언론계 처음으로 실시하여 전통과 신뢰도를 자랑하고 있다. 모든 대학을 공통기준으로 평가하는 종합평가와 각 학문 계열별 특성에 맞춘 계열평가가 있다. 2018년 종합평가는 인문, 사회, 공학, 자연과학, 의학, 예체능 계열 중 4개 이상을 갖춘 전국 4년제 종합대학 중 5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하였다. 일반 종합대학으로 전통이 오랜 유수한 대학 가운데 우리대학은 일반 종합대학으로 전환한 지 7년 만에 10위권에 진입한 것이다.



  종합평가 지표는 교수연구(10개 100점), 교육여건(12개 100점), 학생교육 및 성과(6개 70점), 평판도(4개 30점) 등 4개 부문에 걸쳐 총 32개 지표, 300점 만점으로 평가하였다. 정성평가를 배제하고 대학정보 공시자료 등 공인된 자료를 활용했으며 대학별로 수치를 확인하게 하는 과정을 거쳤다. 우리대학은 300점 가운데 157점을 받았다. 교수연구(29위)와 교육여건(37위)은 부진하였으나, 학생교육 및 성과부문(9위), 평판도 부문(17위)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학생교육 및 성과부문에서 창업교육비율(1위), 졸업생 대비 벤처 창업자 비율(4위), 중도포기율(9위)의 지표 순위가 높았다. 교육여건 부문의 등록금 대비 장학금 지급률(7위), 교수연구 부문의 국제논문피인용(4위) 지표도 높은 순위에 올랐다.



  특히 우리대학은 졸업생 창업활동 지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생 대비 벤처 창업자(최근 7년 내 창업한 39세 이하 창업자 기준) 비율이 4번째로 높았다. 학부는 물론 석·박사 과정까지 창업 과목을 개설하고, 학내 창업오피스를 24시간 가동하며 학생들이 창업에 도전해볼 기회를 열어둔 것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부진한 지표를 살펴보면 교수연구 부문가운데 계열평균 교수 당 교외연구비(31위), 계열평균 교수 당 교내연구비(29위), 인문사회 국내논문 피인용(56위), 인문사회 저·역서 피인용(56위), 인문사회 저·역서 발간(50위) 등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교육여건 부문은 교수 확보율(55위), 강의규모(34위), 세입 대비 기부금(46위), 기숙사 수용률(35위), 학생당 도서자료 구입비(31위), 외부경력 교원 비율(26위), 이국인 교수 비율(48위), 학위과정 등록 외국인 학생비율(37위), 교환학생 비율(25위) 등이 부진하다.



  우리대학이 중앙일보 대학평가에 참여한 지 7년 만에 10위권에 진입한 것은 커다란 성과라 할 수 있지만, 이 평가를 통해 우리대학의 교수연구 및 교육여건에서 한계 또한 분명히 드러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립대학으로서 교육여건 부문은 원천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상당부문 있으나, 교수연구 부문은 부진한 지표를 면밀히 분석하여 지표개선을 도모해 가야 할 것이다.



3. 맺음말



  1910년 4월 15일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로 여명의 모습을 드러낸 우리대학은 내년에 대망의 개교 11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까지 90년사, 95년약사, 그리고 100년사가 각각 편찬된 바 있다. 개교 110주년을 맞이하여 편찬될 『서울과학기술대학교110년사』는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리대학이 걸어온 길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향후 우리대학이 나아갈 길을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성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다. 대학발전의 결정적 장면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대학은 우리나라 4년제 국립대학으로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은 180여 개이고 이 가운데 국립대학은 45개이다. 개교 당시의 미미한 모습에 비할 때 11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우리대학의 위용은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젖게 만든다. 학제상으로 대학 이전 단계에 있었을 때 지금과 같은 우리대학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최근에 들어와 우리대학이 여러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데, 신생의, 아주 젊은, 그리고 역사가 짧은 대학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인식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역사와 연륜이 오래되어 수많은 졸업생이 배출되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고 그로 인해 본받을 것이 많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강조하기 보다는 남이 알아주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점차적으로 우리대학의 졸업생들의 활약상이 증대하고 대학의 위상 자체도 크게 높아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일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누구 혼자 이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개교 110주년을 앞두고 새삼스럽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단순히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오랜 연륜을 지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헌신이 우리대학과 함께 해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역사적으로 우리대학은 경술국치 이전의 ‘대한제국’시기에 설립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여 역사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학술행사를 진행하는 모양인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대학은 대한제국이 종말을 고하는 1910년 8월 29일 이전인 4월 15일에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시장)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한제국의 성격에 대해서는 우리 역사에서 타 민족에 의해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최초의 국가였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광무’의 연호를 내세우고 근대국가인 ‘제국’을 수립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고, ‘구본신참’의 이념에 입각하여 식산흥업을 도모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평가하는 경향이 대두하고 있다. 이 시기에 우리대학의 여명인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대학의 연원은 1970년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5년제) 이종건 교장 재임 당시 개교60주년 행사를 개최하면서 처음 강조한 사실이었다. 이후 70주년, 80주년행사가 계속되었고, 90주년에 이르러 『90년사』의 편찬 과정에서 1910년 4월 15일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의 설립을 알리는 관보(대한제국 관보 제4656호, 한성부 고시 제3호)를 찾아내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초창기 여명기의 미미한 모습은 과장하거나 깎아낼 필요도 없고 담담히 오늘날 우리대학의 뿌리가 거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재인식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축적해 온 연륜과 역사의 무게를 향후 대학발전의 밑거름으로 삼는 당당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실용·실증·실학, 요컨대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우리대학의 학풍이 설립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면히 이어져 왔고,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공업 및 공학교육의 역사였다고 하는 점이다. 어의동 캠퍼스나 아현동 캠퍼스의 초창기 학제에서 계속해서 우리대학과 함께했던 공통된 사항은, ‘공업’과 관련된 학과가 중심이 되어 왔고 동시에 졸업생은 곧바로 취업과 직결되면서 취업률이 높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미 이러한 사실은 우리대학의 역사를 편찬하면서 확인된 것이지만, 『110년사』를 편찬하는 현재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금까지의 특성을 재인식하고 적정한 선에서 공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응용학문 및 실용학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수립해 갈 필요가 있다.



  개교 110주년을 맞이하게 될 우리대학은 이제 또 하나의 전환점 내지는 전기를 앞에 두고 있다. 학령인구의 감소, 4차산업명의 도래, 타일반대학과의 무한경쟁 등으로 인한 학과 및 정원 조정의 구조개혁은 오히려 별문제 아닐지 모른다. 눈에 안 보이는 엄청난 험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뚜벅뚜벅 새로운 도전을 향해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대학의 지나온 역정을 담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110년사』가 오늘의 우리대학을 겸허히 되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추슬러 향후의 역사를 계속 서술해 갈 수 있는 하나의 토대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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