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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런과 들림, 내버려짐 시대의 증상
null ㅣ 기사 승인 2024-03-18 16  |  686호 ㅣ 조회수 : 87

 백화점이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달려간 곳은 이름난 디저트 가게였다. 에버랜드에도 개표가 시작되자 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푸바오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오픈런’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렇게 소비하거나 선호하는 존재를 만나기 위한 달리기는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심지어 대학의 수강신청도 오픈런(‘open learn’이 아니라 ‘open run’이다)과 다르지 않아서 학생들이 매 학기 곤혹을 치른다. 최근에는 심각한 오픈런이 등장했는데 바로 병원 진료다. 소아과 오픈런에다 응급실 ‘뺑뺑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아픈 몸으로 병원을 찾기도 어렵지만 병원에 있는 환자가 내몰리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뛰어난 의료체계를 갖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이런 ‘런’은 의료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발단이 된 의대 정원 확대 문제는 환자와 병원뿐 아니라 대학에도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의대의 증원 수요가 예상보다 훨씬 커져서 이탈 현상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교육부의 자유전공, 무전공 정책이 수립된 것과 겹쳐서 학문의 다양성 위기를 촉발할 것은 자명하다. 인기를 반영하는 흥미로운 이벤트로 알려졌다가 급박한 움직임까지 묘사하게 된 ‘오픈런’은 ‘쏠림’ 현상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한정된 기회를 경쟁적으로 거머쥐어야 하고 심지어 있는 것도 지켜내기 힘든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우리의 마땅한 권리가 당연하지 않게 됐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학 졸업식에서 한마디 했다고 그 자리의 주인공인 졸업생의 입이 막히고 ‘들림’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자신이 설 자리에서 발이 들리고 쫓겨나는 일은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수모다. 오픈런과 들림은 다른 결처럼 보일 수 있다. 들림은 원치 않는 비자발적인 현상이고 오픈런은 그렇지 않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려가는 것이 정말 자신이 원해서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도록 만든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의대 증원 요청과 무전공 입학 비율이 지방대학에서 특히 높다는 것은 정부 정책을 반기거나 교육에 열의가 더 높아서만은 아니다. 학령기 인구가 급격히 줄고 그마저도 수도권으로 몰리는 절박한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역시 쏠림의 문제다. 대안이 없는 쏠림은 내몰림과 다르지 않다. 그래야 그나마 가질 수 있고, 살 수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한 철학자는 ‘내버려짐의 시대’라는 말로 유럽 사회의 역사를 비판한 바 있는데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젠트리피케이션, 프레카리아트, N포 세대라는 용어가 익숙할 만큼 정주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의 삶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면 가족을 꾸릴 생각을 할 리 없다. 현재의 학문이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면 대학에서 학문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다. 대학이 불안정한 사회의 축소판이 된다면 학생들은 냉정하게 자신들의 직업적 미래가 보장되는 쪽으로 달려갈 것이다. 대학 스스로 인기 분야의 취업에 편향된 교육 서비스에 힘을 쏟거나 공간 부족을 이유로 숨 막히는 건물 짓기에만 열중한다면, 그래서 이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비축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대학에서 우려하는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억지스레 인구정책을 펴기보다는 적은 인구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자는 주장이 나오듯이, 대학도 당장의 전공 인원과 공간 확보에 매달리기보다는 학생들이 연구에 흥미를 갖고 직업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방안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대학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모두 끌어안을 수는 없지만, 학생들이 짧은 시간을 보내는 곳일 뿐이지만, 그 시간만이라도 우리대학이 그들의 안전한 터전이 되고 성장할 발판이 되고 혹여 한 명이라도 들리고 내몰리는 일이 생긴다면 단단히 그들을 지켜주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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