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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야, 외로움의 미학에 대해
기사 승인 2023-08-23 09  |  678호 ㅣ 조회수 : 280

 21세기 개인주의는 용기인가 만용인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승하지 않겠다는 ‘비혼주의’를 선언하는 청년들의 증가에 이어 ‘혼자’의 삶을 추구하는 독신주의자 또한 늘어나고 있다.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다가 어느덧 적절한 때가 오면 결혼해 자식을 낳고 늙어가는, 인간이 최초의 문명을 형성하였던 이래로 당연스럽게 답습되어온 삶의 형태가 점차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와 두 명의 자녀가 가정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보는 일명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근래 들어 꾸준히 지탄받아오기도 하였다.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서고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곧 윤택한 삶으로 향하는 길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어진 것이 위와 같은 추세에 한몫 보탠 듯하다.



 청년들의 변화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사회는 저출생 문제를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라 판단하고 막는 데에만 급급한 것 같다. 청년들의 개인주의 성향을 반대한다며 줄줄이 쏟아지는 기사나 칼럼들을 읽어 보면, 겉으로는 현대 사회의 세태와 청년들의 속내 같은 것들을 분석하려는 듯하지만 그곳에 진짜 존중이란 없다. 1020 청년들이 특징적으로 지닌 쿨함과 마이웨이적 성향을 “MZ세대는 원래 그런가 보다”하고 한데 묶어 이해해 보고자 하는 기성 세대의 시혜적인 태도도 실제 청년들이 원하는 소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결심 밑에 감추어진 삶에 대한 고민과 분투, 세대의 경향성 따위는 깊게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혼자의 삶을 다짐하기까지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거쳤을지, 어째서 그 시간의 한가운데에 홀로 놓여져야만 했는지. 이를테면 ‘싱글세’라는 우스꽝스러운 제도의 도입에 대한 논의는 도대체 어쩌다 등장한 것인가. ‘싱글세’의 도입을 통해 해결 가능한 것과 해결할 수 없는 것에는 얼마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가.



 제법 편향적으로 읽히는 단어의 뉘앙스와는 다르게 개인주의는 매력적이다. 개인주의는 인간 모두가 고유한 특성을 지닌 개별적인 인격체로서 권리를 가졌음을 인정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이것에 책임감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서 부터 기반한다. 나의 권리 외에 남의 것은 외면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우리는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이웃이 어떤 체형을 갖고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어떤 취미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어떠한 미래를 그리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남의 시선이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오로지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 의거해 보다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 분명 남을 피해주지 않는 자유의 선이란 누군가 정확하게 지정해 주지는 못해서 어렵고 희미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내 선택만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바뀌어가는 삶 또한 오직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답고 확실한 삶이다.



 흉흉한 사건사고들이 모두를 불안감에 밀어넣는 요즘이다. 사람들의 지나친 개인주의적 경향이 살인과 폭력 사건의 급증에 영향을 미친다고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뿐일까? 폭력적인 미디어로의 용이한 접근성과 여전히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각종 성별, 정치 등에서 가치관 차이로 인한 문제들에 사회는 어떤 책임과 개입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걸까? 개인주의 사회를 걱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그러한 문제의 발생 가능성 또한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청년들이 어째서 돌연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하였는지, 진정 갑작스러운 추세인 것인지는 다함께 의견을 들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개인주의를 ‘나누는’ 경향이 확산될 수 있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다 보면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고 또 괴로워 할 것이다. 그 자명한 사실을 우리 모두 한때는 지나왔거나 겪고 있거나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언젠가 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삶 또한 나의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면 한다. 그렇게 우리가 가진 몫의 외로움을 끌어안되, 이 몫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기를 바란다. 사회가 가진 외로움의 총량이 늘어날수록 그곳은 분명 확률적으로는 더 메마르고 슬퍼질 것이지만, 이 외로움이 반드시 고립되어야 옳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투고 학생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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