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서연(영문·21)
엔들링(endling). 어떤 종의 마지막 남은 개체라는 뜻의 영어 단어다. 필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우리대학 교지편집위원회 러비에서 2024년 말까지 1년간 활동했다. 제1학생회관 2층 오른쪽 복도 맨 끝 위치한, 지금은 텅 비어버린 작은 편집실이 러비의 자리였다. 아마 2025년 이후로 입학한 새내기라면 대부분 러비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기존 재학생이더라도 교지에 관심이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금시초문일 것이다. 이해한다. 바로 그 ‘무관심’이 러비가 폐간한 주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2024년 2학기에 있었던 예산 삭감 때문이지만, 결국 이를 막지 못한 데에는 학우들의 무관심이 있었다.
필자가 러비에 가입한 순간부터, 사실 그 이전부터 학우들의 무관심은 러비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낮은 인지도를 회복하고자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온라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과감히 판형을 변경하고, 발간 횟수를 늘리는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매년 국민 평균 독서율이 하락하는 상황 속에서 교지를 시간 내어 읽으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학업과 취업 준비에 치여 일상을 살아가는 것조차 벅찬 현대 사회의 대학생이라면 말이다.
우리대학 학우들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무관심으로 인한 대학언론의 위기는 본교에서만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아닌, 이미 대학가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만 해도 대학가 곳곳에서 논쟁이 일었다. 성균관대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은 중앙동아리 자격을 박탈당했고, 동덕여대 교지 목화는 학교로부터 편집비 지급이 끊겨 폐간될 위기에 처했으며, 서울대 교지 서울대저널은 과도한 감사로 인해 기구가 해산될 뻔했다. 이외에도 현재 운영되고 있는 대학 자치언론 대부분이 예산 삭감과 인력난, 편집권 침해와 검열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대학생들의 자치언론을 향한 무관심은 사회 문제와 정치 참여에 대한 무관심으로 연결된다. 최근 본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었다. 단일 후보에 대한 반대표를 던져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 대신 아예 투표 자체를 하지 않은 학우들이 많다는 사실은 분명한 문제의식을 심어준다. 심지어 일부 학우들이 후보자에 대한 악의적인 글을 작성해 타인의 선택도 방해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에게도 타인의 정치 참여와 의사 표현을 막을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총학생회와 비상대책위원회의 차이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실태 또한 심각하다. 학교의 문제에도 무지한데, 국가적 문제에는 식견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필자는 묻고 싶다. 그렇게 정치 의제와 사회 갈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느냐고. 당신의 삶은 결코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대학 사회는 학교 밖과 철저히 유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졸업 후 나아가야 할 사회의 축소판이며, 학생 자치라는 이름의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공론장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비난하고 싶다면, 정당한 논리로 반대 진영에 서서 비판하면 된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사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선동하는 행위는 건강한 토론 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 화면 밖으로 나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자. 그곳에는 무분별한 분노와 혐오가 아닌 차분한 연대와 존중이 있을 테니.
2025년 봄, 에브리타임에서 글 하나를 보았다. 교지에 들어가고 싶은데, 이 학교에는 교지가 없냐고 묻는 한 새내기의 질문이었다. 필자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점차 러비의 존재는 잊히겠지만, 그래도 필자는 희망을 놓지 않고 싶다. 이대로 완전한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불어온 독서 열풍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과 탄핵으로 인해 증가한 젊은 세대의 정치 관심은 그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방향을 택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발화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러비가 돌아오길 바란다. 그때 이 글이 에필로그가 아닌 프롤로그가 되어줄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