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취업준비생 B 씨. “작년 이맘때쯤 모처럼 고향에 내려가 명절을 보냈지만 남은 건 상처뿐이었어요. 명절에 모인 친척들의 관심이 저의 취업 여부에만 쏠려 있었어요. 언제 취업할 거니, 누구는 어디에 취업했다더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등 듣기 싫은 말을 자꾸 합니다. 이번 추석은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 집에서 혼자 보냈어요.”
30세 미혼남 C 씨. “이번 추석 연휴 때 큰집에서 3일간 머물렀어요. 남자 나이 서른이면 결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세대 차이일 수 있으니 이해합니다. 한두 마디 건네는 것도 아니고 3일 내내 계속 일장연설을 하는데 듣는 입장에서 정말 고역입니다.”
‘조상 잘 만나 조상 덕 본 사람들은 지금 다 해외여행 가고 없다. 조상 덕 못 본 사람들이 음식상에 절하고 집에 와서 마누라랑 싸운다.’ 지난 추석 때 포털사이트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많은 이들이 댓글에 공감했다. 오늘날 명절이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던 과거와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명절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대학생 203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다. ‘명절이 어떤 날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가족·친척을 만날 수 있는 날’을 선택한 응답자는 47명(23%)에 불과했다. 반면, 명절이 ‘연휴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90명(44%)으로 가장 많았다. 이외에도 명절이 ‘휴식 및 재충전의 기간’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41명(20%), ‘친척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의무감이 느껴지는 날’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25명(12%)이었다. 요컨대, 현대인에게 명절이란 길게 쉴 수 있는 ‘휴가’로 인식되고 있다.
명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의식도 옅어지고 있다. 응답자의 42%(86/203)가 “명절 때 항상 친척들이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명절에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는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다. 특히 최장 열흘의 연휴를 즐길 수 있었던 이번 추석에는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사상 최고치를 달성했다. 인천공항공사에 따르면 추석 연휴 동안 인천공항 이용객 수는 195만 명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추석 연휴 하루 평균 16만 1,066명에 비해 9.3%가 증가한 수치다.
옛말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과거 농경문화의 산물이었던 명절은 전통 축제 기간이었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과거 명절은 조상에 차례를 지낸 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사회가 근대화돼 감에 따라 세시풍속이 많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퇴색됐다. 그나마 남은 것들마저 사라지고 있으며 그 내용도 갈수록 축소돼, 제례의식으로서의 의미만 남게 됐다.
명절의 의미가 퇴색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주의 성향이 커지는 사회 변화를 꼽을 수 있다. 현대인의 가족관이 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집합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형식보다는 명절의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인 가구 증가, 핵가족화와 맞벌이 경향 등으로 사회가 바뀌는 만큼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명절을 보내기 위해 민족 대이동을 치른다. 명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차례를 지내기 위함이다. 한국인들에게 명절날 거행되는 다른 행사는 모두 차례 다음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명절 전통 중 하나인 차례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보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간소화 또는 생략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실제로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가정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로 조사됐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수도권 거주자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 추석에 차례상을 차린다고 응답한 비율은 지난해보다 7.4%포인트 줄어든 61.7%였다. 같은 조사를 시행한 2011년과 2013년은 각각 74.7%, 69.5%로 매년 차례를 지내는 가정이 줄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차례를 반드시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은 개인과 집단 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한국인들에게 부담감을 안겨 주고 있다. 가족의 단결과 화합의 계기가 돼야 하는 명절차례가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차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변화가 확연히 드러났다. ‘명절에 차례를 꼭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는 34명(17%)에 불과했다. 차례를 꼭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로는 대개 ‘간단하게 하면 된다’, ‘옛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등 낡은 구습 때문이라고 답했다. 또한, ‘차례를 지내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일어난다’, ‘불필요한 인력과 돈의 낭비다’ 등 차례의 불필요성을 강조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매년 명절 때마다 대중 매체는 명절 스트레스에 대한 기사를 쏟아낸다.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민족 대이동으로 인한 시간적 스트레스, 차례비용과 선물비용 준비로 인한 경제적 스트레스,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과중한 명절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스트레스 등 명절이 많은 부담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명절 스트레스는 명절 기간에 겪는 모든 활동의 결과물이다.
대학생 203명 중 136명(67%)이 명절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설문에 참여한 101명의 여학생 중 81명이, 102명의 남학생 중 55명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밝혔다. 여성(80%)이 남성(53%)보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1학년(50%), 2학년(74%), 3학년(67%), 4학년(77%)으로 학년을 가리지 않고 명절 스트레스를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로 친척들의 지나친 관심을 1위로 꼽았다. 무료하고 긴 시간, 많은 일거리가 2, 3위를 차지했으며 이외에도 자신의 초라한 신분과 처지 등 다양한 이유가 제기됐다.
한편, 명절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사노동의 불균형이 1위를 차지했고, 차례상 등 과도한 비용 지출과 퇴색한 전통 풍습이 뒤를 이었다. 이외에도 친하지 않은 친척을 봐야 하는 것, 잔소리 등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명절이 가족 문제의 발단이 되고 있다.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가족끼리 신경전을 벌이거나 싸우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으며, 심하게는 이혼소송으로까지 이어진다. 지난해 설날과 추석 전후 10일 동안 일일 평균 이혼신청 접수는 577건이었다. 작년 한 해 평균 일일 이혼신청 건수가 298건임을 봤을 때 2배나 높은 수치다.
명절 스트레스가 특히 무서운 이유는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가 동시에 온다는 점이다. 충남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의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명절 스트레스 수치는 100점 만점에 약 38점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까운 친구가 죽었을 때 겪는 스트레스와 비슷한 정도다.
이런 강도 높은 스트레스는 곧장 건강 문제로 이어진다. 명절 스트레스로 겪는 복합적인 고통의 결과가 바로 ‘명절증후군’인 것이다. 명절증후군의 대표적인 증상은 ▲두통 ▲소화불량 ▲몸살 ▲근육통 ▲손목터널증후군 등이다. 특히, 몸이 축 처지고 쑤시는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기는 호르몬인 ‘코티솔’이 몸을 피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설거지하거나 장시간 운전을 하는 등 육체적인 노동도 코티솔 분비를 유발한다.
과거 명절증후군이라고 하면 주부들이 주로 겪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편, 대학생, 미혼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명절증후군을 겪고 있다.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전 회복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명절에 쌓인 스트레스가 제대로 해소되지 않으면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명절증후군에는 틈틈이 스트레칭을 해주는 게 효과적이다. 또한, 손목에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손목터널증후군도 손바닥 꺾기, 손목 돌리기 등을 통해 예방할 수 있다. 명절이 끝나고 하루 정도는 몸을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숙면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피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가 끝난 뒤 적절한 식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명절에는 전이나 고기 등 기름진 음식이 많다. 이런 음식은 위나 장에 부담을 준다. 또한, 명절 스트레스로 과식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 과식은 소화불량을 유발할 뿐 아니라 피로가 심해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명절 이후에는 과식을 피하고 채소나 과일 섭취를 늘리는 것이 좋다.
명절마다 듣는 ‘취업 언제 할 거니’, ‘결혼은 언제 하니’ 같은 잔소리는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걱정이나 관심 때문이겠지만 듣는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최근,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것 자체를 회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알바몬과 잡코리아가 설 연휴 전 대학생 1,478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약 77.5%가 ‘귀향 대신 아르바이트를 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바로 ‘집안 어른들에게 잔소리를 들을 바에야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버는 게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한, 명절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묻는 본지의 설문조사에서도 ‘따로 없이 참는다’와 ‘자리를 피한다’가 각각 39%, 35.3%로 1,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런 회피는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은 방법이다. 잠깐은 좋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스트레스에 대한 공포를 키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리를 피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기보다 이런 잔소리에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취직은 했니? 누구는 대기업 들어가서 용돈도 갖다 준다더라”라는 잔소리에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좋은 데 들어갈 거예요”라고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꾹 참거나 피하는 것보다 마음이 덜 불편할 수도 있겠다.
명절은 누군가에겐 재충전의 기회이며, 또 누군가에겐 악몽이다. 이제 우리는 명절에 받았던 스트레스는 털어버리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다음에 돌아오는 명절은 서로 조금 더 배려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