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들
1월 14일(일) 경기남·북부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경기도 내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총 8만 1,700건이다. 하루 평균 40건 이상 데이트 폭력이 발생하는 셈이다. 데이트 폭력의 경우 피해자가 신고를 꺼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발생 건수는 더욱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대학 학생 2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이나 과도한 집착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가해/피해 모두 포함)’라는 질문에 8명(33.3%)의 학생이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연애 경험이 있는 3명 중 1명꼴로 데이트 폭력 혹은 과도한 집착을 경험했다.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연인 간 가벼운 질투나 집착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정도가 과하거나 폭력적인 모습이 보인다면 이는 분명히 위험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신호다. 서로가 행복하기 위해 해야할 사랑이 잘못된 양상으로 변질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된 원인으로 ‘부정망상’을 꼽을 수 있다.
데이트 폭력 혹은 과도한 집착을 유발하는 부정망상
흔히 의처증이나 의부증으로 잘 알려진 부정망상(Delusion of infidelity)은 불륜을 저지르거나 외도를 한 일이 전혀 없는 배우자나 연인을 병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는 객관적으로 배우자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그 사실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 어떠한 설명도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권순모 마음숲길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과장(이하 권 과장)은 하이닥 뉴스에서 “부정망상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도청장치나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며, 때로는 그 확신에 의해 폭력을 행사하는 심각한 결과를 보이기도 한다”며 부정망상과 폭력의 연관성을 이야기했다.
부정망상 유발하는 자존감 저하
권 과장은 부정망상의 원인으로 ‘기저 성격과 자존감 저하’를 꼽았다. 권 과장은 “성격적인 부분에서는 다소 권위적이고 편집적인 경우 다른 성격보다 부정망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또한 자존감의 하락이 동반돼 본인이 추구하는 관계가 깨지고 유지할 수 없게 되면 배우자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불안감과 두려움이 커지면서 잘못된 믿음이 확신으로 변한다”고 했다.
이러한 부정망상은 여성에 비해 남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남성 중에서도 중년 이상의 남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중년기 남성의 경우 자존감 저하가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인데, 잘 알려진 원인으로는 ▲외모 및 체형의 빠른 변화 ▲퇴직 및 대인관계 축소 ▲건강상의 문제 발생 ▲성 기능 저하 등이 대표적이다.
본인의 자각이 선행돼야 치료될 수 있는 부정망상
위 설문조사에서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이나 과도한 집착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8명에 대해 이어지는 ‘연인간 데이트 폭력이나 과도한 집착은 상대방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4명(50%)의 학생은 ‘예’에, 4명(50%)의 학생은 ‘아니오’에 응답했다.
의심과 집착 및 폭력을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산이며, 오히려 증명해 확신을 주면 줄수록 증상이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부정망상은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에 속한다. 문제는 부정망상은 치료의 시작 자체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권 과장은 “부정망상뿐 아니라 망상 장애는 정신과 증상 중에서도 치료적인 접근이 매우 어렵다. 또한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병식이 없기 때문에 치료를 시작하거나 유지하기가 어렵다”며 치료 시작 자체에 대한 어려움을 강조했다.환자 본인이 질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고, 현재 본인이 아무런 문제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설득이나 협상을 시도하면 오히려 본인의 생각이 더욱 공고해지고 과격한 행동이 유발될 수 있다.
권 교수는 가장 원칙적인 대처로 ‘환자의 망상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태도’를 꼽았다. 그리고 부정망상의 큰 요인을 차지하는 자존감과 관련해 “자존감의 저하를 가져온 여러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태도를 보이면서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리고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며 천천히 접근해 환자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자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랑을 위한 첫걸음
이미 위험한 사랑을 시작했다면 의심과 집착을 일삼는 당사자가 본인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진단한 뒤,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건강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본인의 자각 없이 상대방의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불행한 사랑의 시작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위험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불안감과 질투를 수반하는 사랑을 하고 있다면 이러한 증상은 부정망상의 전조 증상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상대방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과거 실제로 불륜 혹은 외도를 저지를 전적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이지만, 그런 경우라면 상대방이 믿음을 주지 않았다고 상대를 탓하기 전에 본인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자존감과 관련한 영역에서 진단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진단 없이 상대방이 믿음을 주지 않아 부정을 저지른다는잘못된 믿음이 강한 확신으로 자리잡을 때 부정망상은 비로소 발현되고 불행한 사랑이 시작된다. 초점을 상대방이 아닌 본인에게 맞추어 본인을 계속해서 돌아볼 수 있는 사랑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랑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