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 교수
24-2학기 '진보와 보수'강의
12.3 내란은 45년 전 내 트라우마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군대를 동원한 국회와 선관위 침탈, 도끼로 문을 찍고 총을 쏴서라도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 했다는 대통령의 지시, 군 체포조가 소지한 야구방망이, 송곳, 망치 등 고문 도구, 정치인, 판사, 언론인, 노조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살해계획, 심지어는 비상계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북한에 수차례 군사적 도발을 시도했다는 증언 등. 비록 엉성하고 조악했지만, 그것은 45년 전과 흡사했다.
1987년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산업화에서 이룬 기적만큼 빠르게 발전해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험하다는 경고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에서 발표한 바로 한국은 민주주의 순위에서 2020~21년 17위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2022년 29위, 2023년 50위로 급격히 순위가 추락했다. 2024년 세밑을 앞두고 그런 우려는 마침내 참담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지금 악몽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예전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결코 아니라고 본다. 내란을 교묘한 궤변으로 비틀고, 그 주범들을 당당하게 옹위하는 세력들의 당당한 표정을 보라. 환율이 1,500원을 넘나들고 경제가 휘청거리든 말든, 국격이 삼류로 추락하든 말든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아, 이렇게 한 나라가 망하는 거구나! 우리가 일제 식민지가 되었고, 민족분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구나!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은 진보 대 보수의 대립을 넘어 어느덧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치달리고 있다. 파시즘은 일단 한 번 자리 잡으면 파멸의 순간까지 끈질기다. 히틀러의 나치도 단박에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1923년 비어홀 폭동을 일으켰다가 감옥에 갇혔으며, 그 후 부활하여 10년 만에 정권을 장악하고 전체주의체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2021년 미국 대선에서 패한 트럼프 대통령이 광신적 지지자들을 선동하여 의사당 유혈사태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영구 사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4년 후 그는 당당히 백악관에 재입성하였다.
내란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앞으로 정말 고통스럽고 험난할 것이다. 우리가 피, 땀 흘려 어렵게 만들어온 민주주의와 일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함께 단결해 싸우는 게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단결해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은 오늘날에도 서구 민주주의를 지키는 중요한 전통이 되고 있다.
지금은 비록 암울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을 쏘아 본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게 쏟아져 나와 응원봉을 흔들면서 경쾌한 리듬과 창의적 구호로 국민의 강력한 공감대를 만들어 낸 젊은이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의 지표이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되었을 때, 정쟁과 대결로 얼룩진 정치를 극복하고 공감과 소통으로 어우러진 민주주의가 이 땅에 활짝 꽃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