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양혜정 수습기자(GTM·25)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이 책의 제목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거라 예상한다. 책의 제목을 마주한 순간 ‘정의’라는 단어에 오래 붙들렸다. 어쩌면 그 시작은 더 오래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친오빠와 TV 속 만화영화를 보던 시절부터였을까.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정의를 동경하며 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미디어 속 영웅은 자신보다 주변을 먼저 살피고, 어려운 일에 기꺼이 나서는 이타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만화영화뿐 아니라 액션, 로맨스, 범죄 스릴러, 심지어 공포영화에도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 이른바 영웅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나는 그들처럼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바르게 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내 삶의 목표가 돼 있었다.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 당연해진 세상에서 누군가의 작은 배려는 유독 눈부셨다. 그리고 나도 그 반짝임을 좇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동경하는 그 목표를 향한 길은 비포장도로와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어느새 방향과 목적을 잃곤 했다. 주변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평정심을 잃는 나는 생각이 많아질 땐 집 앞 벤치에서 하루를 되짚어보곤 했다. 내가 아까 한 말은 누군가에겐 상처였겠구나, 이렇게 행동하지 말 걸. 되짚음의 끝은 늘 후회였다. 언제는 TV 속 영웅처럼 멋지고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 말해놓고, 정작 오늘의 나는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을 품은 채 집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 됐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과 내 삶을 비교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휴대폰을 켜면 SNS에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영상이 드물지 않게 올라온다. 그들은 어떤 신념으로 선뜻 손을 내밀 수 있었을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끝내 읽히지 않는, 오롯이 그만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정의가 반드시 눈에 띄는 형태여야 할까. 누군가를 지키고 세상을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답일까. 마음속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정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아닐까. 그 생각은 나의 얽혀 있던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그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처음엔 답이 명확했다. 누군가를 지키고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 세상을 바로잡는 사람이 되면, 이 열망도 자연스럽게 현실이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상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사람들은 쉽게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앞에서는 누구보다 다정하게 대해주며 나도 모르게 마음을 줘버리게 만든 사람이, 돌아선 곳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누군가를 온전히 판단하고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정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모두에게 옳을 수 없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몸소 느꼈다. 그렇게 진로를 바꾸고 또 바꾸면서 정의는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런데도 한동안은 그 목표를 아예 놓아버린 기분이었다. 정의를 좇겠다던 다짐이 갈 곳을 잃고 마음 한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올해 갑작스럽게 신문사에 들어오게 됐다. 수습기자로 보낸 지난 몇 달은 솔직히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나날이었다. 이 일이 내가 그리던 정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쓴 기사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지나가다 “기사 잘 읽었어”라는 한마디를 듣는 날이 있었다. 별것 아닌데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신 옮기고, 그게 어딘가에 닿았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옳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반짝임을 좇는 것이 아닌, 나만의 작은 빛이었다.
남들처럼 뚜렷하고 분명한 정의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온전하고 일관된 정의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옳음을 실천하는 것, 그 다양한 모습들이 모여 정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그리던 길과는 다른 곳에 서 있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나만의 방식으로 그 길을 걷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