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은 삶
기자 승인 2026.07.13 18 715호

 이수민(문창·23)


 

 만약 내게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 상’에 한 표를 던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에어컨을 고를 것이다. 에어컨이 없는 여름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너무 더워서 쓰러지기 직전인 날이라도 리모컨 버튼을 누르면 몇 분 안에 괜찮아진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방구석에서 냉풍 아래 중얼거리고 있자면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작고 흐릿한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이 시원함은 누군가의 더운 미래에서 빌려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상하게도 몸은 분명 시원해졌는데 마음 한구석은 도리어 텁텁해진다. 이 애매하고 흐릿한 죄책감은 마치 냉장고 모터 소리와도 같다. 굳이 귀를 기울인다면 신경 쓰이지만 평소엔 잘 느껴지지도 않는다. 늘 희미할 뿐인 감각이다. 내겐 미래 세대를 위해 더위를 참아야겠다는 뚜렷한 신념도 분명한 성찰도 없다. 다만 불길한 직감만이 어렴풋이 손아귀에 남아 있는 것만 느낀다. 이대로 과연 괜찮은 걸까. 사실 괜찮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일단 집에 오자마자 에어컨을 켠다. 살아 있어야 죄책감도 느낄 수 있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가끔은 그 찝찝한 기분 속에서 이런 것도 깨닫곤 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를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나 차의 편리함, AI의 빠른 대답 같은 것들은 이미 나의 삶과 아주 긴밀하게 달라붙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고민도 AI에게 물어보는 게 습관이 됐다. 더 빨리 답을 얻기 위해, 덜 지치기 위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질문을 던지는 게 익숙해졌다. 그 편리함 뒤에서 소모되는 냉각수와 자원을 생각하면 내가 누르는 엔터키 하나가 가벼운 죄의 현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나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 조금씩 가해자가 돼 버린다. 그럼에도 이 흐릿한 죄책감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멈춰 세우지는 못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금보다 더욱 자원이 부족하고 더운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 예감하고 있다. 다만 그 부정확한 앎을 끝까지 밀고 갈 힘은 없어 보인다. 특히 ‘당장’이라는 단어로 인해 우리는 꽤 시달리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들은 누구나 당장 성적을 내야하고, 당장 취업을 준비해야 하고, 당장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빽빽한 일정표 앞에서 윤리적 위기는 자꾸만 뒤로 밀리기 마련이다. 세상을 망가뜨리는 쪽에 기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지만, 동시에 각자의 급선무가 있는 한 그 시스템을 섣불리 깰 수도 없다.



 다시 돌아와서, 이 죄책감은 결국 삶의 소음 속에 묻혀버릴 뿐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희미함 때문에 더 오래 남는 것 같기도 하다. 불현듯 깨달은 냉장고의 모터 소음이 아주 오랫동안 내 주변에 내려앉는 것처럼. 문득 어떤 날에는 내가 너무 무딘 인간이 된 것 같아 두렵고, 또 어떤 날에는 이 미세한 불편함조차 없다면 정말 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죄책감은 나를 심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감정을 ‘내가 아직 완전히 무뎌지지 않았다는 증거’라 부르고 싶다. 타인의 고통과 미래의 비용을 완전히 잊지 못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진동 같은 것. 나는 이 감정을 없애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나를 완벽하게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해도, 적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두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일도 나는 에어컨을 켤 것이고, 차를 탈 것이며, AI에게 질문할 것이다. 아마도 여전히 많은 것을 바꾸지 못한 채 졸업에 집중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고 불편한 감각을 붙들고 살아가고 싶다. 세상을 단번에 구할 수는 없어도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 균열을 잠시 응시하는 일. 어쩌면 희망은 그런 형태로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작고, 아주 흐릿하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는 감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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