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소개 l 공지사항 l PDF서비스 l 호별기사 l 로그인
시 부문 최우수
기사 승인 2020-12-07 01  |  639호 ㅣ 조회수 : 1425



프롬 닥터 외 2편

박선영(문예창작학과·17)



프롬 닥터



욕조를 떼어낸 자리에 남은 본드 자국을 손으로 훑어본다

얼마나 많은 죽음을 목격했니 너는



세상의 모든 죽음은 피동이다



자, 생각해보세요

칼이 죽이거나 총이 죽이거나 암세포가 죽이거나 전염병이 죽이거나 자동차 본넷이 죽이거나 손가락이 죽이거나 눈초리가 죽이거나 나이가 죽이거나 돈이 죽이거나 죽여줄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없어서 스스로를 죽이거나…



해일이 몰려오는 밑그림을 그려놓고

파란색 물감을 전부 짜는 동안 생각해보는 거예요



거친 붓 자국을 피할 수 있을까요 스케치북은



다정한 상담사와 처방전은 있으면서도

예방주사가 없는 병원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세신사가 되는 게 꿈이에요



싸구려 스킨 냄새를 풍기던 그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빈 집의 창문에는 김이 서려있다



차갑거나

뜨거운

그렇지만 희뿌연



그의 팔 한 쪽에 남아있던 흉터를 생각한다

매일 밤 샤워를 해도 사라지지 않던 흔적



노력을 하세요 노력을 어떤 노력을 해야죠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만이 살 길입니다 뭐든 좋으니 노력을 하세요

- 주치의 드림



연한 살이 다 벗겨지도록 때를 밀던

젖은 머리가 마를 틈이 없던

상처 위에 붕대를 감거나 파운데이션을 여러 겹 덧바르던



노력을 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과연 누가 죽인 걸까?



오늘도 병원은 열심히 굴러가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집을 그려보세요

사람이나 나무도

가장 행복했거나 가장 불행했던 순간도

이루고 싶은 꿈이 뭔지도



그런 걸 전부 그려보세요



크레파스는 부드럽게 뭉개지고 종이 위에 잠깐 물결이 일다가

어느새

와르르 쏟아진다

 


*

파동

여진이야,



땅이 조금 흔들렸고 네가 뒤를 돌았다

떨어져 나오는 것들에 맞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이불을 가로로 덮고 나란히 누우면 자는 동안 발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다

스무개의 발가락은 부끄러워 보였고

어쩌다 서로의 엄지가 부딪히면 작게 진동이 울렸다

그런 날에는 꼭 악몽에 시달렸다



세상이 흔들리는

집이 무너지는

얼굴이 무너지는



공사비를 물어줘야 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침 일찍 끝맺고 저녁 늦게 시작하는 사람의 몫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 집 안과 밖 사이에는 시차가 있나봐

첫 끼로 마른 아몬드를 씹으며 너는 웃었다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자꾸 흔들렸고



어제는 내가 꾸다라는 말을 생각해봤어 그런데 꾸다는 꿈이랑 돈밖에 수식할 수밖에 없더라고 신기하지 꿈도 돈처럼 어디서 꾸어오는 건가봐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빚을 지고 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오직 서로의 꿈만 빌려다 꾸기로 약속하자



이자는 받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를 준비했다

사방은 어두웠고 입안을 훑으면 치약 맛이 났다



우리는 짧은 이별에 대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불을 끄기 전 마지막 할 일을 다 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멈춘 벽시계를 뒤집어 놓는 일

덜컹거리는 창문 틈을 수건으로 틀어막는 일



그리고 마침내 여진이야 소리가 들리고 나면



세상이 흔들리고

집이 무너지고

얼굴이 무너지면

너는



뒤를 돌아보고



 


*

웬디와 네버랜드



1 기억을 잃은 자들의 기억은 어디로 갈까



그 마을에는 기억을 잃은 사람이 없었다.

원로가 휘파람을 불었다. 축제의 시작이었다. 초대받은 이웃들이 광장에 몰려들었다. 이제 막 기억을 잃기 시작한 웬디는 테이블 위에 안락하게 누워있었다. 네버랜드행 배가 곧 도착하겠군! 웬디를 위한 선물이 낡은 가죽가방 안에 쌓여갔다. 선택받은 자를 위해 모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갓 구운 호두파이에서 김이 났다. 발과 발과 발이 겹쳤다. 누구의 발이 누구의 얼굴 밑에 달려있는 지 웬디는 알 수 없었다. 호두파이 위에 잇자국이 남았다. 그 해 가을 호두는 유독 고소했다. 웬디는 원래 호두를 좋아했었나. 아니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었던가. 가방의 지퍼가 잠기자 뱃고동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고, 웬디는…



2 기억을 기억하는 건 기억의 몫



그 섬에는 집에서 가방을 매는 관습이 있었다.

집에서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웬디는 웬디만큼의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 가방을 열면 얼룩이 쏟아졌다. 분명 가방 속의 것은 가방 바깥의 것보다 중요했을 텐데, 웬디는 그 얼룩이 자신의 어떤 흔적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네버랜드에는 종종 밤과 낮이 엉망으로 엉켰다. 웬디는 한밤에 지하철을 타러 갔다. 아마도 그림자를 꿰매는 일을 하기 위해서.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개찰구에 트럼프 카드를 찍었지만 요금은 빠져나가지 않았다. 웬디는 무료로 내선순환행 열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향했다. 하염없이 도는 풍경들 사이에서 웬디는 멈춰야 할 역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기 보다는 애쓰고 싶어 했다. 애쓰기 위해서는 먼저 애썼다는 단어를 기억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웬디는 결국 다시금 집으로 돌아왔고. 여전히 집에 돌아가고 싶었으므로…



3 (…)



별안간



가방이 베란다 아래로 추락했다.


기사 댓글 0개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쓰기 I 통합정보시스템, 구글, 네이버, 페이스북으로 로그인 하여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확인
욕설,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01811] 서울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 최초발행일 1963.11.25 I 발행인: 김동환 I 편집장: 김민수
Copyright (c) 2016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