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의 경계
‘우리’의 범주는 모호한 반면 ‘나’는 분명하고, ‘나’가 선행해야 ‘우리’가 존재한다. 근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우리는 각자 존재하고 나는 홀로 소멸한다”라는 말은 불확실성으로 얼룩진 21세기 사회의 그늘을 간명히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인지 주체의 내부와 외부 어딘가에 모호하게 걸쳐진 채로 존재하는 대상은 때때로 이질감을 생성하며, 주체와의 분리 및 배제를 통해 고유한 정체성마저 부정 받기도 한다. 이러한 타자화가 혐오를 낳고, 혐오는 인간 존엄의 감각을 잃게 한다.
<아포브 전시 :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인류를 서로 적대시켜 분란을 일으키는 혐오와 그 표현 현상을 예술가들의 시각으로 경험하고 공감을 나누는 시뮬레이션 전시다. 아포브 (APoV)는 Another Point of View의 약자로, 과거 실제 상황들을 수집하고 한 자리에 모아 동시대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작년 11월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리고, 이번에는 아름다운 섬 제주의 포도 뮤지엄 개관전에 초청받아 1년간 상설 전시로 또다시 개최된다. 제주도의 이면에도 사실 가짜 이데올로기로부터 오랜 기간 지배받아 역사의 희생양으로 지낸 어둠의 시기가 존재한다. 1948년부터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민을 향했던 가짜뉴스와 혐오의 굴레는 섬 전체의 1/10의 인구를 무자비하게 학살시켰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는 제주도민에게 결코 아물 수 없는 상흔을 남겼음에도 제주도는 억울하게 고통받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꾸준히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현재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제주도에서 아포브 전시를 개최하는 것은 공간적으로도 더욱 의미가 있다.
이번 제주전에는 한·중·일 작가 8인이 참여한다. 기존 참여 작가인 ▲강애란 ▲권용주 ▲성립 ▲이용백 ▲최수진 ▲쿠와쿠보 료타에 이어 중국의 ▲장 샤오강과 한국의 ▲진기종 작가가 새로 합류했다. 작가들의 설치작 외에도 5개의 테마 공간이 디지털 인터랙티브 등의 체험 방식을 통해 입체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 권용주 작가의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 성립 작가의 ‘스치는 익명의 사람들’
▲ 강애란 작가의 ‘숙고의 방’
첫 번째 전시실인 ‘균열의 시작’에서는 사람들이 가볍게 옮기는 뒷담화와 가짜뉴스가 대중의 불안을 먹이 삼아 눈덩이처럼 자라나는 과정을 그린다. 두 번째 전시실 ‘왜곡의 심연’은 익명화된 군중의 모습과, 정당한 분노로 둔갑한 과잉 공감이 만들어낸 혐오의 역사 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세 번째 전시실인 ‘혐오의 파편’에서는 오해와 편견으로 상처 입고 얼룩진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어두운 주제를 마주하게 되면서 강렬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혐오에 맞서고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기시키고, ‘우리’와 ‘그들’은 과연 정말로 다른 존재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시는 끝을 맺는다.
혐오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코로나-19 상황의 불확실성은 혐오를 범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는 우리를 갈라놓지만, 취약함은 우리를 뭉치게 한다”라는 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를 묘사하기도 했다. 혐오가 낳는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연대와 공존을 통한 사회적 방역의 길을 모색해볼 때인 만큼, 제주도에서 ‘다른 생각(Another Point of View)’의 조각 조각들을 경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