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원아트센터에 전시된 색 추출 결과물, ‘이모션 백신’
이모션 백신 : 감정의 메커니즘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명언에 공감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감정에 관해 의심을 품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확신을 요구하기도 한다. 감정은 이처럼 직접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언어’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기록하고 간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언어로의 상징화 과정을 거친 감정은 그 틀에 맞춰지기 위한 압축을 해야 한다. 감정의 본성은 끊임없는 변화임에도, 이처럼 확인을 하려면 박제의 과정이 불가피하다. 천영환 작가(이하 천 작가)의 <Random Diversity> 는 이러한 매 순간 변하는 감정을 예술로 실체화하고자 한 전시이다.
<Random Diversity> 의 ‘색 추출 실험’은 사람이 특정 사진을 봤을 때의 뇌파를 감지해 기억과 감정을 ‘디코드(Decode)’한 뒤 ‘색으로 추출’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개개인이 색상에 반응하는 시신경 활성화 정도와 특정 대상이나 장면을 바라볼 때의 뇌 활성화 유사도 분석을 통해 세상에 하나뿐인 색상으로 추출되는 원리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감정을 뇌파로 치환해 만들어낸 ‘이모션 백신’을 얻게 된다.
천 작가는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같은 뇌파를 가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모션 백신의 추출된 색깔의 의미에 대해서는 작가도 해석해줄 수 없다. 세상의 문자나 음성 언어로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으며, ‘열정’적인 ‘빨간색’, ‘시원’한 ‘파란색’ 등 기존 색이 지닌 사회적 통념은 색의 의미를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색은 특정 개인의 감정의 결과물로서 의미를 오직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고유한 실체를 갖게 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천 작가는 감정의 ‘유동성’을 표현하고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처럼 가시광선의 파장으로 색을 이해하는 인간과, 빛의 전기신호를 색으로 이해하는 비인간(AI) 사이 협업은 찰나의 감정을 가시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나아가 천 작가는 이러한 알고리즘을 후각, 미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에 적용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특정 향기에 자극받아 잊었던 지난 과거의 기억을 재생해내는 현상인 ‘프루스트 효과(The Proust Effect)’를 이용해 후각으로의 치환을 실현해냈다.
<Random Diversity>의 ‘향 추출 실험’에서는 감정을 향기로도 간직하며 체험할 수 있다. 기존 뇌파 측정과 더불어 ‘fNIR(기능적 근적외 분광법)’을 활용해 후각이 관여하는 뇌의 변연계(Limbic System) 반응을 측정한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프랑스 조향사 ‘Jeanne Paessera’와 함께 고유한 기억을 담은 향수를 제작한다. 실험에서 ‘과거의 향(Nostalgia)’은 ‘새로운 향(Fragrance)’으로 조향된다.
천 작가의 이전 <After All This Time> 전시는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지금과 앞으로 지키고 간직해야 할 우리의 기억과 감정은 무엇이어야 할지’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전시였다. 나아가 이번 전시는 백신 보급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잃어버린 기억은 무엇인지 회상하며, 다시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고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수한 이들의 감정을 뜻하는 이모션 백신들이 줄지어 꽂힌 전시장 안 실험공간의 벽은 아름다운 빛깔을 내며 개인의 감정이 갖는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행복했던 순간과 소중한 대상에 대한 기억으로 만들어진 이 색이 치유와 위안의 백신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