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비롯한 국내 주요 대학에서 ‘성 중립 화장실’ 설치를 예고하며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성 중립 화장실은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장애인 등 모두가 차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뜻한다. 성 중립 화장실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 ‘혼성 화장실’로도 불린다. 성 중립 화장실에는 칸마다 잠금장치와 세면대, 양변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성 중립 화장실은 최근 들어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과 사회적 역할이 점차 사라지며 인권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불평등을 개선하고, 모두에게 안전한 화장실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중립 화장실,
선한 파장을 일으키다
일반적인 공중화장실은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로 분리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인터섹스(간성) 등 성소수자들이 이용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 외에도 원래 성소수자를 배려하려고 만든 성 중립 화장실이지만, 의외로 장애인이나 고령의 노인들 같이 다른 소수자 집단에게도 도움이 된다.
중증장애인들이나 일부 고령 노인들, 그리고 아직 대소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영유아를 대동한 부모들은 당사자와 보호자의 성별이 다르다면 당사자의 화장실 이용을 위해 보호자가 주변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 성 중립 화장실에 부착된 아이콘 스티커에는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외에도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등의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성 중립 화장실은 ▲성소수자 외에도 ▲휠체어를 탄 부모를 모시는 자녀 ▲어린 자녀와 함께 외출한 부모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가 없어 불편했던 아빠와 같이 기존의 성별을 나눴던 화장실을 사용하며 불편을 겪어야만 했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성범죄의 위험에
노출되다
그러나 성 중립 화장실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성범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 영국에서 성 중립 화장실에서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지난 3월 17일(현지시간) 영국 코번트리에 있는 칼루돈 캐슬 학교의 성 중립 화장실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성 중립 화장실을 사용 중이던 피해 여학생은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억지로 화장실에 들어오려고 했다. 문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칼루돈 캐슬 학교의 9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에는 성 중립 화장실만 마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학생들은 여자 화장실이 없어 생리할 때가 되면 학교에 나오는 것이 꺼려진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조지아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트렌스젠더 학생에게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허용했다가 5세 여아를 상대로 한 트렌스젠더 성범죄 사건이 발생했으며, 위스콘신주의 고등학교에 설치된 성 중립 화장실에서도 18세 남학생이 여학생을 성폭행해 성 중립 화장실이 폐쇄되는 사건도 있었다.
국내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도 성 중립 화장실 설치를 시작하는 단계에 놓여있어 범죄 취약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각종 성범죄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대학생 이모 씨(24•여)는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해서는 필요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성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클 것 같아 굳이 쓰고 싶지 않고, 옆 칸에 누가 앉을지도 모르는데 무서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모 씨(21•남)도 “남자 화장실이 꽉 차 있을 경우 급할 때 사용하기에는 편할 것 같지만, 선뜻 가기 꺼려진다”며 “혹여나 여학생들에게 오해받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서로 눈치를 보는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이런 흐름에서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비롯한 여러 국내 대학에서 성 중립 화장실을 설치하고 운영할 것을 예고했다. 서울대에서는 학교 발전소로 쓰였던 파워플랜트 건물(문화예술원)에 성 중립 화장실 준공이 확정됐다. 개별 단과대학 곳곳에서는 ‘가족 화장실’이라는 이름의 화장실을 장애인, 성별 구분 없이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도 논의 중이다.
카이스트는 지난해 말부터 한 단과대학 건물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을 모두의 화장실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현재 해당 화장실 하나가 운영 중이며, 새로 리모델링한 건물에도 추가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국내 대학 중 가장 먼저 성 중립 화장실을 만든 건 성공회대다. 성공회대학교 인권위원회는 지난 3월 16일(목) ‘모두의 화장실 준공 1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위원회 측은 “장애인, 아동과 양육자, 성소수자 등 기존의 화장실 사용이 어려웠던 소수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상징적 의미가 있다”며 “설치 위치나 학교 측의 관리 소홀 등을 앞으로 해결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평등을 위해
이처럼 성 중립 화장실은 소수자를 위해 시행돼 여러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범죄에 노출되기 쉬워 문제가 되기도 한다. 모두에게 평등한 화장실을 위해 아직 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서나연 기자
*인터섹스 : 염색체, 생식샘, 성호르몬, 성기 등에서 전형적인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정의로 규정되지 않는 성질을 가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