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 30일(금)에 SRT의 선로 전기 공급 차단 문제로 160대가 넘는 열차가 줄줄이 지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SRT는 여러 대응 방안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분명 SRT 열차 사고인데 KTX 대체 열차가 오고, SRT 직원들이 아닌 코레일 직원들이 안내했으며, 사고 사흘 뒤 수서역엔 자주색 SRT 열차가 아닌 푸른색 KTX가 서 있었다. 철도에 경쟁 체제를 도입한다는 취지로 출범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현재 SRT가 다니고 있는 수서와 평택 사이를 연결하는 수서고속철도 노선은 원래는 수서발 KTX라 불리며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가 운행을 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철도 민영화를 추진했던 박근혜 정부는 수많은 논란 끝에 SR이라는 새로운 법인을 만들어 수서고속철도 노선을 운영할 수 있는 사업권을 줬다. 이로써 2016년 12월 ‘철도 경쟁시대 개막’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수서에서 부산과 목포를 오가는 SRT가 개통됐다. SRT의 운영사는 ㈜SR로 ▲코레일 41% ▲사학연금 31.5% ▲IBK기업은행 15% ▲산업은행 12.5%의 지분구조를 가진 공기업으로 자회사인 SR이 모기업인 코레일과 고속철도를 놓고 경쟁하는, 유례없는 철도 경쟁 체제가 만들어졌다.
SRT는 철도에 경쟁 체제를 만들어 코레일의 적자운영과 독점 폐해를 타파하고 서비스 경쟁을 통해 국민편익을 증대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경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2021년 기준 SR은 전체의 3분의 2나 되는 22대의 KTX 차량을 코레일에서 빌려 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코레일에는 열차가 남아도는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빚까지 내서 새로 산 열차를 빌려주고 있었다. 심지어 열차 임대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코레일이 열차를 사면서 생긴 채권 이자율은 3.6%였다. 그러나 SR에 열차를 빌려주고 받는 임대료를 이자로 환산하면 3.4%이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 산 열차를 경쟁사에 손해 보면서 빌려주고 있는 꼴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열차 대여료를 당시 국토부에서 정해줬다는 것이다. 정부가 코레일에는 손해를 떠넘기고 SR에는 큰 특혜를 몰아준 상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지난 연말 SRT 사고 사흘 뒤 수서역에 푸른색 KTX가 서 있었는데 이는 SR과 코레일 간 사고복구 등 계약에 따라 고장 난 SRT 열차 대신 KTX 열차가 대체 투입된 것이다. 또한 사고 당일 동대구역에선 SRT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코레일 직원들이 안내해줬었는데 이 역시 SR과 코레일 간 여객서비스 계약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 밖에도 SR은 ▲승객 운송 ▲역무와 매표 ▲차량구매와 정비 ▲승무원 지원까지 거의 대부분을 코레일에 위탁하고 있다. 철도에 경쟁 체제를 도입한다는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SR의 업무 대부분을 코레일에게 맡기는 구조다.
KTX와 SRT가 경쟁 상대가 되면서 여러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KTX에서 SRT로 환승하기 위해선 따로 예매해야 하며,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환승 할인도 SRT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당연히 마일리지 호환도 불가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SRT가 운행하지 않는 지역 주민들의 불편이다. 현재 SR이 운행하는 노선은 호남선과 경부선으로 정차역은 18개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SRT가 다니지 않는 지방에서 대형병원과 금융회사가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권과 인접한 수서역으로 가려면 중간에 SRT 정차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국민의 편익 증대를 위한 경쟁 체제 도입은 오히려 지역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두 철도 기업의 중복 운영으로 인해 해마다 수백억 원에서 천억 원이 넘는 중복 비용이 발생한다는 분석도 있다. 박동주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고속차량 통합 운영 시 현재보다 하루 최대 52회, 연간 1,000만명 이상에게 좌석을 추가로 공급할 수 있다”며 “좌석 공급 확대에 따른 매출 3,000억원 외에도 분리 운영으로 인한 중복비용 560억이 감소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국민들의 불편과 실효성 없는 경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국토부 관료들이다. 대표적인 철도 민영화론자였던 이승호 전 국토부 교통물류실장은 2017년 2월 퇴직하고 보름 만에 SR 사장으로 부임했다. 이런 관료들은 또 있었다. 지난 2007년 민자로 개통한 인천공항철도는 적자가 누적돼 2년 만에 코레일이 떠맡게 됐다. 하지만 흑자로 전환되자, 2015년에 국토부는 다시 민영화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민영화된 회사 사장으로 김한영 전 국토부 교통정책실장이 오게 됐다. 역시 철도 민영화를 주장한 국토부 전관이다. GTX A노선의 시행사 에스지레일의 대표이사와 신안산선 시행사인 넥스트레인의 대표이사, 소사-원시 복선전철 사업사인 이레일 전현직 대표이사도 국토부 고위 관료 출신들이다.
지난 4월 4일(화) 국토교통부는 오는 9월부터 SRT 운행을 경전선, 전라선, 동해선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현재는 부산과 전남 목포, 즉 경부선과 호남선에만 운영해왔는데, 9월부터는 전남 여수와 경북 포항, 경남 창원으로도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코레일이 운영하는 KTX를 SR 노선에 투입하는 방안에는 선을 그었다.
이에 철도 노조는 KTX의 노선 확대는 외면한 채 SR의 노선만 확대하겠다는 정부안이 민영화 수순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코레일에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일반 열차까지 운영하도록 하면서 SR에는 수익이 나는 고속철도 노선을 추가해 장기적으로 수익이 남는 곳부터 민영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5월 1일(월) 노동절을 맞아 부산에서 관련 집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SRT 운행을 확대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철도노조도 참여했다. 민영화 계획은 없다는 국토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철도 민영화를 둘러싼 갈등은 더 고조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