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학기 교내 신문사에 복귀해 학생 기자 활동을 다시 시작하며 글쓰기 능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생각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물론, 항상 머리 속에 추상적으로 떠다니는 생각들을 문장으로 적어 내리려면 막막하기만 했다. 부족한 어휘력 때문에 매번 사전에서 유사어를 찾아보고, 이 단어가 여기서 쓰이는 게 맞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로 인해 한 기사를 쓰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려 애를 먹고는 했다.
최근 한국인의 문해력 저하에 심각성을 제기하는 기사들을 자주 접했는데, 해당 기사들과 댓글들을 보면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하다. 학보사 기자로서 차마 말하기 힘든 고민이기도 하다.
얼마 전 ‘심심한 사과’, ‘사흘’ 단어를 두고 한국인의 문해력에 관한 논란이 뜨거웠다. 해당 논란이 더 점화된 것은 “쓸데없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며 문해력 저하에 어떠한 심각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일한 태도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 단어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어휘력 저하 또한 이러한 현상의 한 과정이라는 의견도 존재했다.
기자는 해당 논란을 보며, 또 나의 모습을 보며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논제에 심히 공감하고 있다. 해당 논제와 비슷한 맥락으로 조지오웰의 『1984』가 떠오르기도 한다. 『1984』에서는 언어가 중요한 지배 수단이다. ‘빅 브라더’는 신어 사전 편찬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언어는 우리에게 있어 단순한 의사 표현 수단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이런 언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최근 한국인의 문해력 저하가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를 알 수 있다. 언어는 곧 사고의 한계,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세계의 한계이다. 만약 행복감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쩐다’ 밖에 없으면 어떨까?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음에도 행복이 무엇인지,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또 내가 어떤 문제에 관해 불편함을 느껴도 언어가 부족하다면 머리속이 어떠한 말로 구체화되지 않고, 이를 비판해 문제를 바꾸려는 시도조차 못 할 것이다. 이렇듯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내가 아는 감정이 줄고, 문제의식과 비판의식 또한 줄어드는 것이다. 국민들의 언어 능력 저하는 결국 한국 사회의 미래 발전에 관한 문제다.
평소 언어생활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줄임말, 인터넷 유행어, 그리고 비속어가 함께했다. 기자가 아는 한에선 그것이 나의 생각을 가장 짧고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주관이 없어 쩔쩔매면서도 ‘삶에 치여서’, ‘뭔가를 깊이 생각해 볼 만큼 여유가 없어서’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어쩌면 기자 본인이 ‘언어의 한계로 인한 세계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때는 독서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자는 책보다 TV나 영상 매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으며, 나름의 가치관도 형성해 갔다. 이 세상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어른들이 왜 그렇게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는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언어는 나를 한층 더 고차원적인 사고로 이끌어 주며 더 큰 세상을 보도록 만든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 형용할 수 있는 것, 또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나의 세계는 넓어진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