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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여성 권력자 서태후(1835-1908)와 그녀의 별장 이화원 |
“다시는 나처럼 정치하는 여인이 없도록 하라.” 중국의 3대 악녀로 손꼽히고, 청나라 말기 모든 권력을 독차지했던 서태후가 죽기 전 남긴 말이다. 이 때늦은 후회가 있고 5년 후, 청나라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서태후는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으로 시작해서 황실 최고 어른인 태후까지 오른 인물이다. 사람들에겐 서태후로 잘 알려졌지만, 정식 명칭은 자희 태후로 동궁에 거처하던 동태후(자안 태후)와 구별하기 위해 서태후로 불리게 된 것이다.
서태후는 그녀의 아들인 동치제가 황제가 되자 처음에는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했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무를 일임했고, 동태후가 죽자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권력을 잡은 서태후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친아들까지도 희생시켰다. 동치제가 성장하자 위기감을 느낀 서태후는 동치제와 황후를 핍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치제가 병에 걸리자 치료조차 받지 못하게 방치해 죽게 만든다. 서태후에게 동치제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이었던 것이다. 서태후는 아들이 죽은 뒤에도 섭정을 하기 위해서 성인 황족이 아닌 3살 난 조카 광서제를 차기 황제로 선택한다.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던 시기의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같은 외세의 침략, 태평천국 운동 등으로 대내외적인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개혁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강유위의 주도로 일어난 변법자강운동에 대해 서태후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이자 황실을 전복하려는 시도로 생각하고, 보수파 관리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운동을 주도한 개혁파 관료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서태후는 중국역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엄청난 사치벽으로 유명하다. 그 예로 그녀는 한 끼에 128가지의 음식을 먹었는데, 이는 보통 농민의 1년 식사 값과 맞먹었다. 또한, 수만 벌의 옷을 갖춰 매일 옷을 갈아입었으며, 진귀한 보석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치 가운데 최고는 이화원을 지은 것이다. 서태후는 인공호수와 별장을 확장하거나 수리하기 위해 해군을 건설하는 데 쓰일 자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는 해군력 약화로 이어져 청일전쟁 패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게다가 그녀는 황실의 어른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를 무시하고 수시로 궁에 애인 영록을 불러들여 향락을 즐겼다. 이는 관리 부패와 매관매직으로 이어져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게 된다.
대외적으로도 서태후의 실정은 이어진다. 서태후는 원래 반청단체인 의화단을 구슬려 외국 열강들에게 대항하게 하려 했으나, 이는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청나라가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청나라는 이후 서양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한다.
1908년, 광서제가 죽자 서태후는 어린 부의를 황제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질 때문에 그 다음 날 죽었고, 5년 뒤 부의가 신해혁명으로 퇴위하면서 청나라 또한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