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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상하고 어이없는 정책들을 시행했던 차우셰스쿠(1918~1989) |
“경제 파탄? 웃기지 마세요. 우리 식료품 가게에는 유기농 식료품으로 가득하답니다.” 루마니아를 수십 년 동안 지배한 차우셰스쿠의 1989년의 연설 내용이다. 하지만 현실은 연설 내용과 많이 달랐다.
차우셰스쿠는 15세 때부터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활약한 인물로, 1947년 소련군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산 정권이 세워지자 정치계에 입문했다. 그는 공산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고, 이후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뒤 1967년 권력을 차지한다. 차우셰스쿠는 국가지도자가 된 후 소련이나 중국과 다른 독자노선을 걸었지만,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다. 더불어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고 언론을 억압했으며 반대세력을 제거하려 하는 등 독재정치를 펼쳤다.
차우셰스쿠는 유례없는 황당한 정책들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강제 임신 제도‘이다. 이 법은 가정마다 아이를 최소 5명씩 낳도록 강요했다. 이를 채우지 못한 사람들에겐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낙태나 피임을 하기 위해 국외로 나가다 적발된 사람들은 전부 총살했다. 이 덕에 출산율이 잠시 상승하기도 했지만, 때마침 전염병이 돌아 오히려 유아사망률이 급증해버리기도 했다. 또한 고아들을 수용할 시설이 부족해 아이들이 길거리를 전전하는 일이 빈번했다. 고아 중 운이 좋은 극소수는 차우셰스쿠의 친위대인 ‘세쿠리타테’에 배속돼 부를 누렸지만 선택받지 못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 불리며 공장으로 팔려가거나 구걸하면서 살아야 했다.
차우셰스쿠는 무리한 경제정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원래 풍족한 농업 국가였던 루마니아를 무리하게 공업화시키려다 엄청난 부채를 만들어 냈다. 엽기적인 점은, 이 부채를 갚기 위해 수출만 하고 수입을 금지하는 정책을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전기와 가스가 끊기고 생필품과 식량이 부족해지는 등 루마니아 국민의 생활 수준은 피폐해지기만 했다.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동경해 스스로를 개인숭배의 대상으로 만들려 했다. 그는 김일성이 만든 주체사상을 번역해 루마니아 전역에 보급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선전했으며, 북한의 정치체제를 모방했다. 하지만 루마니아는 북한과 달리 종교 활동이 활발했고, 유교를 바탕으로 한 충성화가 힘들었기 때문에 우상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커져가는 국민들의 불만을 의식한 차우셰스쿠는 TV, 신문 등을 통한 정책 선전을 강화하는 한편, 전 국민이 2,000만 명뿐이던 루마니아에 300만 개에 달하는 도청장치와 1,000개가 넘는 도청센터를 설치해 국민들을 감시했다. 더불어 친위대를 동원해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등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폭발 직전의 민심을 억누를 수 없었고, 결국 1989년 12월에 혁명이 일어났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친위대를 동원했지만 정부군까지 등을 돌린 상태에서 성난 국민들을 막지 못했고, 결국 부인과 도주하다 체포되고 만다. 차우셰스쿠는 생중계로 진행된 재판에서 너무나 당당한 태도로 자신을 변호했다. 이 때문에 그의 변호사마저 변호를 포기했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차우셰스쿠는 군인들에게 수백 발이 넘는 총알 세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