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삶에도 평범함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본 대상에는 항상 특별함이 있다. 30년간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나희덕 교수(문예창작학과)를 만나봤다. 서정적인 시어로 자신의 삶을 노래했고, 울분의 시대에 타자의 이야기에 가슴 아파했다. 시를 향유하다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그의 시 세계에서 대상들은 어떻게 관찰되고 새로운 시어로 거듭나는 것일까? 그를 만나 물어봤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로 30년 남짓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와 산문, 비평 등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18년 동안 재직하다가 지난 2019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오게 됐습니다. 새로운 학교생활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현대 시 이론과 창작 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Q. 시를 쓰기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 읽기에 흥미를 느껴서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인들의 시집을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어느새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학교가 멀어 하루 2시간 이상 걸어서 통학을 하다 보니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고, 늦은 밤에 말과 생각을 만지는 일을 좋아했지요. 시를 읽고 쓸 때 가장 충만하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시 쓰기를 좋아하고 백일장에서 상도 자주 탔지만, 이렇게 오래 시인으로 살아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Q. 교수님이 생각하기에 시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A. 글쎄요. 시와 시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결국 정의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이나 확인에 불과하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도 말해야 한다면, 저는 시인을 ‘잘 보고 잘 듣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만물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오래 응시하고, 세상의 소음이나 권력에 눌려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정성껏 귀를 기울이는 사람.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게 들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묻고 또 묻는 사람. 자기의 표현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섬기는 사람…… 시인에게는 이런 태도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오직 시를 통해서만 전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칼럼이나 산문을 쓸 때는 비교적 내가 쓰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구성이나 논리가 필요하지요. 생각의 설계도면 같은 것을 미리 만들어두고, 필요에 따라 적절한 사례나 인용으로 글의 논지를 보충해주면 되고요. 그러나 시는 그런 이성적 작업만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시인은 사실 자신이 어떤 시를 쓰려고 하는지 처음엔 어렴풋하게 밖에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또한 어떤 정서적 충동이나 대상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어야 시적 파토스가 생겨나지요.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시여, 침을 뱉어라』) 입니다. 이렇게 시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몸과 정신이 하나 되는 지점에서 예민한 감각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면서 메시지의 전달보다는 시어들의 우연한 결합과 생성으로 만들어지는 독특한 뉘앙스를 잘 살려내야 하고요.
Q. 교수님은 주로 언제 시상이 떠오르세요?
A. 저 역시 일상의 많은 시간을 비(非)시적인 상태나 소모적인 일들을 처리하며 보냅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한 줌의 나락처럼 시적인 시간이나 상태를 만들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일상을 누리고 매체적 자극에 무방비로 자신을 내주면서는 그게 불가능하지요. 시적인 감각과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활과 관계 등을 최대한 줄이고 단순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시를 집중해 쓸 때는 며칠씩 집에 처박혀 있거나 혼자 여행을 떠나 낯선 곳에 원고 뭉치를 부려놓기도 합니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창작과 직장생활,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며 살아와서인지 요즘엔 어디 가지 않아도 모드 전환이 빨리 이뤄지는 편이에요.
Q. 혹시 지금까지 본인 작품 중에 가장 각별하게 여기는 작품이나, 학생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시가 있나요?
A. 여덟 권의 시집을 냈지만, 그중에 특별히 애착이 가거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책을 하나로 짚어 말하기는 어려운데요. 초기 시들보다는 가장 최근 시집인 『파일명 서정시』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 지금 저의 삶이나 생각에 좀 더 가깝겠지요? 그리고 제가 가장 힘들고 불안했던 삼십 대에 쓴 『어두워진다는 것』은 제 문학의 변곡점에 해당하고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힌 시집이에요.
Q. 교수님은 현재 우리대학 문예창작학과의 교수이기도 합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A. 대학 시절 은사인 정현종 시인께 진로에 대한 상담을 하러 갔었는데, 시인이 되라는 얘기 대신에 “너는 좋은 선생이 될 거야.”라고 하시더군요. 그땐 저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말로 듣고 좀 서운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르바이트든 봉사든 직업이든 저에겐 늘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주어졌고, 그걸 열심히,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아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앎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게 하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게 선생의 역할이지요. 교육이란 훈육이나 계몽이 아니라 ‘함께’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라고 여기고부터는 선생 노릇이 좀 더 자유로워졌어요.
Q. 시 창작 수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강조하며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교수님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창작한 ‘좋은 시’란 과연 무엇인가요?
A.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가르는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요. 오히려 가장 시 같지 않은 것이 왜 시가 되는지 그 지점이나 이유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고, 시적인 전통이나 규범들을 배우는 것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깨뜨리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지요. 그래서 이론 수업의 경우에도 최대한 다양한 시대와 경향의 작품들을 다루려 하고, 시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관해 토론을 많이 해요. 창작 수업은 그야말로 개인지도에 가깝지요. 학생 각자에게는 자기만이 쓸 수 있는 창작의 씨앗들이 있지요. 그걸 발견하게 해주고 끌어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조언해주는 게 선생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Q. 『땅끝』, 『푸른 밤』, 『귀뚜라미』 등 교수님의 시가 각종 모의고사와 수능에 출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교육 특성상 문학 작품에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에 관한 비판이 있기도 합니다. 이에 관한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 교과서에 시와 산문이 많이 실리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그만큼 학생들에게 문학작품으로 향유되기보다는 입시를 위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교과서적인 해석에 갇히게 되니까요. 시는 가장 함축적인 언어로 돼 있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그걸 하나의 정답으로 처리하는 일 자체가 문제이지요. 이반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시를 읽는 것은 맛있는 포도를 먹듯이 포도 한 알 한 알의 맛을 음미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시는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소리를 내어 읽어보고, 손글씨로 필사해보고, 시화나 시영상을 만들어보고, 패러디시나 새로운 창작시를 써보면서 총체적인 감각 경험을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리고 수동적인 독서에서 능동적인 표현과 창작으로 확장하면 더 좋겠지요. 요즘엔 중고등학교 문학교육도 집중식 수업이나 1학기 1책 읽기, 작가와의 만남 등 그런 모색을 하는 것 같더군요.
Q. 자기 문학의 스승이라고 생각할만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혹은 가장 좋아하는 국내외 작가가 있으면 누구이고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습작기 때부터 저는 누군가의 ‘제자’나 ‘마니아’가 되는 걸 경계해 왔어요. 물론 대학에서 뛰어난 시인인 정현종 선생님을 은사로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지요. 그분께 제가 배운 것은 시인으로서의 품격과 자유로운 정신이었어요. 그러나 구체적인 시의 지향이나 경향, 시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등은 많이 다른 편이었어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그런 독립성을 유지하는 게 오히려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돼요.
독서를 할 때도 대립적인 성향의 작가들을 맞대응 시켜 서로를 거울 삼아 비교하며 읽었어요. 그런 방식이 비평적 균형감각을 기르면서 저만이 쓸 수 있는 시의 영토를 찾아가도록 만들어 줬어요. 존경하고 좋아하는 시의 스승들이야 너무나 많지요. 정지용, 이상, 김수영, 김춘수, 김혜순, 이성복… 이 목록들에도 짝패가 보이지요? 요즘엔 선배들 시보다 후배나 신인들의 시를 훨씬 열심히 읽어요. 그 젊은 시들을 따라갈 필요는 없겠지만, 시를 보는 눈이나 언어에 대한 감각은 젊게 유지해야 하니까요.
Q. 초기의 서정시부터 최근 세태를 비판하는 시까지 교수님의 시 세계에는 여러 변화가 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시를 창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혹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A. 저의 초기 시에는 주로 “서정적, 모성적, 자연적” 등의 수식어들이 많이 따라다녔지요. 어느 순간 그런 특성들이 고유한 개성이라기보다는 저를 가두고 있는 인식의 틀이거나 미학적 관습 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완전히 깨뜨릴 수는 없지만 조금씩 깨뜨려나가며 갱신해가고 싶었고, 그런 점진적 변화 속에서도 초기 시와는 꽤 다른 지점에 와 있는 제 자신을 보게 돼요. 또한 제 자신의 변화란 어떤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환경이나 시단의 흐름과 연동돼 있지요. 그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시가 발생하거나 천착하는 지점들도 달라지기 마련이고요.
지난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쓰는 동안이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이나 억압,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격차 등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시기였고, 저 역시 그런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파커 J. 파머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변화란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아니라 마음이 부서진 평범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여서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가 서야 할 자리는 바로 그 마음이 부서진 자리, 비통한 자들의 곁이지요. 그 시대를 통과하며 지니게 된 저의 우울과 슬픔이 다른 이의 슬픔과 만나 그런 어두운 시들이 쓰였던 것 같아요.
Q. 최근 발표하신 『코로나가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라는 글에서 사회적 약자에 주목했듯이, 사회 담론에 관심을 가지며 여러 칼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참여적인 태도를 글로 남기고자 생각하게 된 계기가 혹시 있을까요? 그리고 시를 창작할 때 영향을 미치나요?
A. 물론이지요. 시와 산문의 문체적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제가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느끼느냐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위험을 무릅쓰고 전셋집을 구하러 다녀야 했는데, 그러면서 다양한 사람살이를 들여다보게 되더군요. 자본과 문명, 질병 등에 관해서도 좀 더 실감 나는 생각들을 하게 됐지요.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돌보지 마라.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더 이상 그 얼굴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입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이러한 명령들에 불복종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다짐을 하면서요. 코로나로 온 세계가 고통과 혼란을 겪고 있지만, 이 위기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대의 한계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Q. 최근 새롭게 작품에 담고 싶은 주제나 생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지난 학기 대학원 수업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최근의 페미니즘 이론이나 생태주의 담론, 인류세 논의 등과 어떻게 연결해 사유하고 실험해갈 수 있을까에 관해 다뤘는데요. 이와 관련해 도나 해러웨이, 로지 브라이도티, 루스 이리가레 등의 책들이 연이어 번역돼서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또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관한 연재를 올봄부터 시작했고, ‘물질’을 키워드로 한 단상들을 쓰고 있습니다.
Q. 시인으로서, 교수로서 새로운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A. 겨울방학에는 그동안 쓴 예술비평을 모아 새로운 단행본을 내기 위한 정리와 집필에 집중했어요. 앞으로도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 장르들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들을 계속 써보려고 해요. 시가 아닌 다른 언어들이 오히려 시적인 것을 촉발하고 새로운 감각을 갖도록 해주니까요. 특히 작년부터 다큐멘터리 수업을 들으면서 ‘기록’의 중요성과 풍부한 가능성에 놀라며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보고 있어요. 시와 다큐멘터리는 얼핏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들은 시와 소설과 에세이와 다큐멘터리, 그 모든 걸 포함하고 있지요. 그런 글을 쓰기 위해 움직이는 현장을 향해 발걸음을 더 옮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