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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길에는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예방 건축설계기법인 셉테드(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CPTED) 기법이 도입됐다. 셉테드는 공공장소에서 이용자의 동선을 유도하거나 CCTV 등을 통해 경각심을 일으키는 등 사전에 범죄를 막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이다. 디자인을 통해 범죄 심리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시야를 가리는 구조물을 없애거나, 가로등을 설치하고, 공공장소의 엘리베이터를 투명유리로 설치하는 것들은 셉테드 기법이 도입된 예시다.
영국에는 디자인으로 범죄를 줄이는 방법을 고안하는 ‘디자인 어겐스트 크라임 센터’가 있다. 이 센터는 영국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자전거 절도를 예방하기 위해 자전거 주차장과 거치대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이 디자인이 런던 시내에 도입된 이후 자전거 도난 사건 발생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센터를 설립한 로레인 게먼 교수는 “실질적인 범죄 발생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범죄자와 피해자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셉테드 기법을 도입한 ‘범죄예방디자인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다. 염리동과 가양동 공진중학교를 시작으로 올해는 서초구 반포1동, 성동구 용답동, 송파구 마천2동 등이 사업대상지로 선정돼 변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관악구 행운길, 중랑구 미담길 등이 범죄예방디자인을 도입해 밝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서울시의 이 프로젝트는 2014년, 아시아 최고의 국제 디자인 공모전인 DFA(Design for Asia Awards)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금길을 소금소금 걸어보아요
범죄예방디자인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염리동 소금길은 원래는 마포나루에 소금을 실어 나르던 소금장수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주변에는 소금창고가 가득했고, 수시로 소금배가 드나들었다.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소금장수들은 각자의 터전을 마련했다. 염리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간이 흘러 염리동은 여느 달동네처럼 후미진 골목길과 음침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어둡고 싸늘했던 염리동은 우범지역으로 여겨졌고, 사람들은 점점 발길을 돌렸다. 그러던 2012년, 염리동은 서울시 범죄예방디자인프로젝트의 시범사업 대상지로 지정됐고, 마을의 모습은 점점 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달라진 염리동에 ‘소금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금길의 초입에는 ‘소금나루’가 있다. 높은 지대에 있는 염리동 주택에 수돗물을 끌어올려 공급하던 대흥가압장은 ‘소금나루’라는 간판을 달고 주민 공동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소금나루는 지금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24시간 초소 기능을 하고 있는 소금나루에서는 소금길 안에 자리한 6가구의 ‘소금지킴이집’에 설치된 IP 카메라 영상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있다. 또, 평일 오후 8시부터 자정 사이에는 마을 주민들이 안전용품을 착용하고 소금길을 순찰한다. 소금나루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책방과 양심껏 돈을 내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등이 자리해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도맡고 있다. 가끔 학생들이 만든 소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공방교실에서 탄생한 공예품도 전시한다.
1.7km의 좁은 골목길은 미로 같다. 소금길 바닥에 그려진 노란 점선은 우리를 미로의 세계로 안내한다. 점선을 따라간다. 점선은 소금길의 가로등을 이어주고 있다. 소금길에는 69개의 가로등이 있는데, 모든 가로등은 노란색 페인트 옷을 입고 1부터 69까지의 번호가 적힌 명찰을 달고 있다. 혹시라도 범죄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가로등 번호로 경찰이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길을 걷다보면 종종 샛노란 대문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소금지킴이집’이다. 대문 앞 바닥에는 SOS라고 적힌 노란 표시가 눈에 띈다. 범죄 발생 시 지킴이집 대문 옆에 달린 비상벨을 누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킴이집에 달린 강한 조명은 밤에도 지킴이집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안내원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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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코스와 B코스로 나누어진 소금길은 운동하기 좋은 길이다. 두 코스를 모두 걷는 데는 4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하는데,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한 시간 정도는 예상하는 걸 추천한다. 소금길의 표지판 역할을 하는 번호달린 가로등 몇 개에는 운동하는 법이 적혀있다. 전문 트레이너가 일일이 걸어보면서 각 골목의 특성에 맞춘 운동코스를 개발했다고 한다. 높은 계단이 많은 골목에서는 탄탄한 허벅지를 만들 수 있고, 넓고 평평한 도로는 파워워킹 구간이다. 오를 때마다 없어지는 칼로리와 늘어나는 수명을 기록한 계단은 감히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오르면 어느새 등판은 후덥지근해지고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다. 소금길의 꼭대기에는 한서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학교 주변으로는 8-90년대의 냄새가 나는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스크림 있음’이라는 종이팻말이 붙은 문방구에는 어릴적 즐겨 하던 뽑기 기계가 2대 놓여있다. 문방구 양쪽으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미닫이문의 작은 슈퍼와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낡은 간판을 단 피아노 학원이 있다. 염리동 소금길 주변 전체가 그렇다. 염리동의 시간은 8-90년대에서 멈춘 듯하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서인지 염리동 소금길 군데군데에는 ‘바닥놀이터’가 눈에 띈다. 사방치기와 미로게임 등의 바닥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마련돼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바닥에 돌멩이로 금을 그어놓고 뛰놀던 모습을 회상하게 한다. 아쉽게도 바닥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닥놀이터를 보고 있자니 염리동이 한결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좁은 골목길에는 필요하면 가져가라며 집주인이 내놓은 그릇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집도 있었다.
소금길에는 6개의 작은 길이 또 있다. ‘꽃이 피어나는 소금길’이라는 테마로 덩굴류 식물이 가득한 능소화길을 비롯한 해당화길, 해바라기길, 라일락길, 옥잠화길, 쑥부쟁이길이 각각의 매력을 자랑한다. 옥잠화길에서 만난 우체통은 초록색 이파리들로 가득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작은 동네는 작은 미소를 선물한다.
범죄, 얼마나 줄었나요?
셉테드 기법이 과연 정말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까.의문은 단박에 풀렸다.
2012년 염리동에 범죄예방디자인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서울시는 염리동 주민 2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사업을 진행한지 5개월 만이었다. 결과는 서울시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주민들의 범죄 두려움은 13.6% 감소했고, 만족도는 83.3% 증가했다. 가장 중점적인 목표였던 범죄 예방 효과도 78.6%나 증가하면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냈다. 실제로 염리동의 5대 범죄(살인·강도·강간추행·절도·폭력) 발생률은 연평균 2.91%, 절도 발생률은 7.48% 감소했다(2015년 기준).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지역들도 범죄 예방 효과를 속속 보고 있다.
소금길이 눈에 띄는 범죄 예방 효과를 보이자 여러 지자체와 단체에서는 소금길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소금길 벤치마킹을 위해 과테말라 공무원 5명이 소금길을 방문하기도 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수원시 고등동 마을만들기협의회에서 소금길을 다녀갔다. 부산시에서는 지난 3월 11일 셉테드를 이용한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사업을 실시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셉테드 디자인이 도입된 지 3년여가 지난 지금, 관리가 부실하다는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예쁜 벽화를 그려놔도 관리가 부실해 지워지는 경우가 많아 미관을 해치고, 지킴이집의 비상벨이 작동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염리동 소금길의 벽화 중에도 지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고, 재개발 대상으로 선정돼 이미 빈집이 된 지킴이집도 있었다. 셉티드가 제 기능을 여실히 수행할 수 있으려면 추후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해 보인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 절로 기분도 좋아진다. 염리동 소금길이 그렇다. 밤에는 절대로 걷기 싫던 달동네가 180도 달라졌다. 칙칙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옛 악명이 됐다. 염리동 소금길이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지금의 밝고 기운찬 모습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전유진 기자
uzj109@seoul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