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여러 대학에서 학생의 성적평가 방식을 교수 재량에 맡기고 있다. 이를 자율 평가제라고 한다. 자율 평가제는 해당 학과나 교수가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중 성적평가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교수의 재량권을 보장하고 학생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대표적으로 ▲연세대 ▲이화여대 ▲고려대 등이 자율 평가제를 도입했다. 연세대는 2019학년도 1학기부터 자율 평가제를 시행했다. 연세대 측은 자율 평가제 시행을 통해 학생들 간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학습에 대한 재미와 창의성을 제고하겠다고 밝혔다. 이화여대는 2018년 1년 동안 자율 평가제를 시행했고, 교수와 학생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교수는 학점평가에 대한 정해진 기준이 아닌 실제 학업성과에 맞춰서 평가할 수 있는 점을 긍정적 효과로 꼽았고, 학생은 작은 점수 차이로 학점을 평가받는 경우 감소를 긍정적 효과로 꼽았다. 이와 관련해 본지는 이화여대 재학 중인 A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A 씨는 이화여대 자율 평가제 도입의 장점은 “학업에 분명한 목표가 생긴 것”이라 말했다. 이어 “학점 때문에 친구와 경쟁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교수가 제시한 명확한 기준이 생기다 보니 학업 의욕이 생겼다”라며 자율 평가제의 도입으로 불필요한 학점경쟁 또한 줄었다는 점도 전했다.
한편 고려대는 2016학년도부터 절대평가를 시행했다. 고려대 학사 운영 규정에 따르면 ▲학과·부에서 지정한 교과목 ▲선택 교양 교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절대평가로 성적평가를 하게 돼 있다. 2016학년도 기준, 고려대는 약 67%의 수업을 절대평가로 실시했다. 이외에도 숙명여대 제51대 총학생회는 자율 평가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자율 평가제 도입으로 인한 타 대학의 혼란과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자율 평가제 요구안’을 작성했다. 대표적으로 ▲상대평가 원칙 폐지 ▲평가방식의 선택 이유 명시 ▲평가방식 선택 전 사전 심사 절차 마련 ▲평가 기준, 학점 대별 점수 기준 명시 등이 있다. 평가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마련해 기준을 명확히 하고, 일명 ‘학점 퍼주기’를 방지한다. 학생 의견수렴을 위해 여론조사를 진행했고, 도입을 위해 준비 중이다.
We aren’t friends, This is competition
상대평가는 개인의 학업성과를 다른 학생의 성적과 비교해 집단 내에서 상대적인 위치를 평가하는 방법이다. 객관적이고 효율적인 평가 방법이라 믿어왔지만, 상대평가는 ▲학습 목표 달성 불분명 및 학습 의지 저해 ▲학습의 변질이라는 측면에서 비판받고 있다.
상대평가는 학생의 학업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상대평가의 결과만으로 학생이 교수의 학습지도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학점이 높다고 해서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높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자율 평가제를 도입하고 있다. 교수의 학습 지도 목표와 학생의 학업성취도 달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제2외국어 강의를 들 수 있다. 연세대는 자율 평가제 도입 이후 ‘일본어(1)’ 과목의 수강자가 약 1.5배 늘었다. 상대평가에서는 전공자 혹은 이전에 일본어를 배운 사람이 높은 학점을 쉽게 얻는다. 따라서 교양과목을 통해 새롭게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의 학습 의지를 저해한다. 하지만 자율 평가제 도입 이후 성적에 대한 부담이 줄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들이 편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상대평가의 다른 문제점은 강의 선택의 기준이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가’로 전락하는 것이다. 강의를 통해 지식을 쌓는 것에 앞서서, 높은 학점이 나와야 졸업과 취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학점 받기 쉬운 강의 ▲이 강의는 과제가 많아 벅차다 등 다른 강의에 영향을 주지 않고, 쉽게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강의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이처럼 상대평가로 진행되는 강의는 지식을 배우는 기회가 아닌, 자신의 스펙을 맞추는 도구로 변질하고 있다.
얼렁뚱땅 도입은 무리
자율 평가제를 도입한 타 대학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이 몇 가지 존재한다. 첫 번째로 장학금 선발 기준이 높아진다. 자율 평가제를 도입한 후, 절대평가로 이뤄진 강의가 많아지면서 학생들의 학점이 높아진다. 교수가 지정한 기준에 만족하면, 다른 학생의 점수와는 상관없이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장학금 혜택을 받기가 이전보다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다. 여러 대학에서 학점 인플레이션 문제점을 지적했고, 몇몇 학교는 절대평가 내에서 A, B 학점의 최소비율 설정해 학점 퍼주기를 방지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단순히 상대평가의 기존 학점평가 비율을 상향한 것뿐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두 번째는 교수의 재량권이 지나치게 높아진다는 문제점이다. 자율 평가제의 도입으로 교수는 자신의 강의에 적합한 학점평가 방식을 선정한다. 만약 절대평가로 강의가 진행되고 앞서 언급한 절대평가 내 학점 최소비율이 설정되지 않는다면, 학점 분배의 몫은 교수의 자율에 맡겨지게 된다. 또한 학점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면 왜 그 학점을 받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점이 자율 평가제 도입에 앞서서 다양한 장치(▲평가방식 선택이유 ▲평가방식 선택 심사 절차 ▲평가에 대한 구체적 기준 명시)를 마련하는 이유이다.
세 번째는 학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증가다. 학점은 학생의 학업 성실도와 학업 능력을 평가하는 도구이다. 하지만 자율 평가제로 많은 학생이 높은 학점을 받게 된다면, 기업은 학점을 통해 지원자를 평가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채용 담당자가 생각하는 일반적 학점 기준과 학생이 평가받은 학점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몇몇 학생들은 학점 받기 쉬운 학교라는 부정적 인식이 취업 준비에 방해가 될까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우리대학 학생취업지원팀은 “블라인드 채용 열풍 때문에 공·사 기업들이 학점을 많이 보지 않는 추세이고, 자격 조건이 GPA 4.5점 만점에 3.0 이상이면 지원 가능 등 학점 기준을 대폭 낮췄다”라며 “학점 자체가 채용을 크게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대학의 도입 가능성은?
자율 평가제를 시행하는 대학은 아직 많지 않다. 게다가 시행 중인 대학은 국내의 최상위권 대학이고, 사립대학이다. 변화에 앞서서 도입한 사례가 적고 학교마다 차이가 있어,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우리대학도 자율 평가제 도입 가능성이 있는지 문의했다. 학사지원팀 윤민호 팀장은 “우리대학에 자율 평가제 도입은 아직 어려움이 있다”라며 “항상 성적평가와 관련해 다양한 방안을 논의 중이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