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영국 로이터통신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익명 예술가’ 뱅크시의 유력한 정체를 공개해 예술계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오랜 기간 본명은 물론 성별과 인종을 철저하게 숨긴 채 활동해 온 그라피티 작가·사회운동가 뱅크시의 정체가 폭로된 후 예술계는 “그가 더 이상 우크라이나나 중동의 분쟁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게 됐다”며 로이터통신을 비판했다. 작품이 140만달러에 낙찰되자마자 파쇄해 버리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반전사상을 담은 벽화를 그리던 ‘행동하는 예술가’ 뱅크시의 활발한 창작 활동이 익명성의 훼손 앞에 큰 위기를 맞았다.
예술가들의 익명 창작, 유구한 전통
예술가들이 정체를 숨기고 익명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다양한 장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임상춘 작가 역시 여성이라는 사실 외에는 본명과 나이 등 기본 정보를 모두 비공개한 채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가수 중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얼굴 없는 가수’ 문화는 물론이고 현재도 일본에서는 얼굴과 정체를 가린 가수들이 도쿄돔 투어 등의 콘서트 활동까지 성황리에 이어가고 있다. J-POP 가수 Ado는 도쿄 출신의 2002년생 여성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높은 인지도에 비해 밝혀진 정보가 거의 없다. 얼굴을 가린 채 노래하는 가수와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은 익명 예술가의 창작이 갖는 힘을 실감하게 한다.
웹툰이나 출판 만화의 필명 문화 역시 작가의 출신과 성장 배경보다 작품 자체에 집중하도록 도움을 준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개봉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귀멸의 칼날> 원작자 고토게 코요하루 역시 고향과 나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정보를 비공개에 부쳤다. 일부 인기 작품의 원작자가 작품 시사회나 팬 사인회 등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는 다소 상반된 행보다.
▲ 우크라이나 호렌카 마을 건물 외벽에 그려진 뱅크시의 작품(출처=Reuters/연합뉴스)반복되는 악질적인 신상 털기
그러나 익명 예술가를 겨냥한 악질적인 ‘신상 털기’가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방해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뱅크시의 후보로 추린 세 명의 거리예술가 중에서 진짜 ‘뱅크시’를 특정하기 위해 그의 △법원 기록 △경찰 문서 △(광고판 훼손에 대해) 2000년에 작성했던 자필 자백서 △우크라이나 출입국 기록 등의 문서를 입수하고 1년간 끈질기게 추적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뱅크시의 변호사 마크 스티븐스가 언론사에 직접 서한을 보내 해당 사항을 보도하지 말 것과 함께 “이 보도가 사생활을 침해하고 예술 활동을 방해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뱅크시가 익명 또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보복이나 검열, 박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권력에 앞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한다”고 호소했다.
‘나폴리 4부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필명) 역시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탐사보도 기자 클라우디오 가티가 엘레나의 △부동산 거래 △금융 기록 △인세 흐름을 추적한 뒤 실명을 특정하고 기사로 발행해 큰 논란이 일었다. 정치와 권력, 전쟁과 인권의 논의에서 보다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다는 익명성의 가치가 ‘알 권리’와 특종이라는 목적에 의해 끊임없이 훼손되고 있다.
익명성의 가치, 자유로운 창작
‘잭슨홍’이라는 이름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대학 홍승표 조형예술학과 교수에게 예술가들이 자신의 인종이나 성별 등의 배경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익명으로 활동하는 이유를 묻자 홍 교수는 “예술가 자신의 인종, 성별, 계급, 학력 등의 배경은 창작의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발상을 제한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독자나 관객들 역시 작가의 출신 배경을 지표 삼아 작품을 관성적으로 읽어내는 경우도 많다”고 밝혔다. 또한 “이때 작가들이 ‘익명성’을 새로운 돌파구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덧붙였다.
홍 교수는 뱅크시의 정체를 밝힌 신상 털기에 대해서는 “뱅크시 작업 매체의 시작점이 반달리즘*에 기초한 그라피티였기에, 작업의 결을 지키기 위해 익명을 사용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의 본명을 걸고 동일한 행위를 했다면, 아마도 백인 남성 작가가 거리의 비주류예술을 전유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익명성과 폭로의 문제에 대해서 홍 교수는 “뱅크시에게 익명성이란 작업의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 불가결의 수단이었지만, 유명 예술인으로 등재된 순간부터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을 것”이라며 익명과 폭로가 단순히 정의와 도덕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했다.
“익명성, 더 좋은 창작을 위한 도구”
홍 교수는 “가명을 사용한다고 한들, 작업은 축적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책임의 양도 증식한다. 우수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은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예술가들에게 익명성이란 좋은 작품 환경을 만들기 위한 도구이며, 거물 예술가들에게는 익명성의 폭로마저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 4월 30일(목), 뱅크시가 SNS에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올렸다. 런던에 세워진 뱅크시의 새 작품은 커다란 깃발에 얼굴이 가려진 채 정장을 입고 걷는 동상이다. 동상은 영국 왕실의 궁궐과 가깝고 과거 제국주의를 기념해 개발됐던 거리에 세워져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뱅크시를 비롯한 많은 익명의 예술가가 정체를 가린 채 다양한 창작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반달리즘: 공공의 재산이나 사유 재산을 고의로 파괴하거나 해를 끼치는 행위.
이혜원 기자
dl0840@seoultech.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