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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문학 평론 부문 최우수
기사 승인 2020-12-07 01  |  639호 ㅣ 조회수 : 440



불화하는 시대의 꿈들과 문학의 새로운 꿈 :

정지돈 소설의 한 가지 독법


이원기(문예창작학과·18)



0. 시대와 꿈, 정지돈 소설 읽기



  이렇게 말해보자. 소설을 쓰는 것은 결국 언제나 세계에 대해 말하는 일이며, 그 작업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직선상에서 가장 깊고도 첨예하게 지속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정지돈이라고. 등단작 「눈먼 부엉이」부터 최근의 단편집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정지돈의 글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모티프는 시대와 시대의 꿈에 관한 것이다. 그의 소설들 속에는 이제는 과거가 된 어떤 시대들과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낙관주의와 더불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꿨던 꿈으로서의 미래를 돌아보는 흥미로운 시선이 포착된다. 그의 소설에서 과거와 미래는 마주 세워진 두 개의 거울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미래를 통해 과거를 보게 된다.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한다.”(?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스위밍꿀, 2017년, 154쪽)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과거로 가 미래를 꿈꾸기도 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가 과거에 꿨던 꿈에 얼마나 다가섰는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시대와 꿈이라는 주제로 정지돈의 소설들을 검토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다소 번잡스럽지만 우선 그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꿈의 두 가지 양상에 각각 ‘과거의 미래’와 ‘현재의 미래’라는 표현을 붙여보자. 전자는 과거에 사람들이 꿈꾸던 미래가 소설 속에 나타나는 경우며, 이때의 꿈은 ‘희망’이라는 의미다. 후자는 꿈꿔온 미래와 오늘날 현실 사이에 괴리가 나타나는 경우며, 이때의 꿈은 환상, ‘헛됨’을 의미한다. 정지돈은 소설을 통해 한 시절의 꿈이었던 미래와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퇴색된(혹은 되는) 광경을 그리며, 희망과 헛됨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가 꿈이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서 충돌하도록 한다.



1. 과거의 미래와 꿈-희망



  정지돈의 소설에서 우선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지나간 시대를 붙잡아두려는 인물들이다. 「눈먼 부엉이」의 에리크 호이어스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절판된 옛 책을 읽고 수집하고 쓴다. 「창백한 말」의 장은 어떠한가. “그는 20세기 초반에 경도되어 있었고, 혁명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때의 사상과 예술, 사람들을 줄줄 읊고 다녔다.”(74쪽) “장은 옛날 책과 영화를 너무 봤고 어느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사람들은 각자의 세기에 살고 있었다.” 나나 미주가 21세기에 산다면 장은 20세기 초반을 살고 있었다.”(75-76쪽)



  이들이 과거에 이토록 사로잡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과거가 “모든 게 가능해 보이던 시절,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세계”(74쪽)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과거는 곧 꿈-희망의 시대였다. 과거의 희망찬 미래관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1950년대는 전 세계가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들떠 있는 시기였고 그곳이 자본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국가든 모두 새 건물을 짓고 새 다리를 짓고 새 집을 지었다.”(155쪽) 이러한 서술은 곧 소설의 인물들이 낙관적인 미래만이 펼쳐져 있던 그 시대의 꿈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자의 세기에 살고 있”는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와 시대적 꿈-희망을 공유한다.



  정지돈 소설 속 또 하나의 인물 유형은 지나간 시대‘의’ 인물들이다. 장뤼크 고다르와 페넬로페 질리아트를 포함한 68혁명 전후의 영화인들(「주말」), 이구와 김수근, 김원을 포함한 근대한국의 건축가들(「건축이냐 혁명이냐」), 사진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인 장 팽르베(「바다의 왕은 장 팽르베」,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등이 그들이다. 과거에 살았던 실존 인물인 이들이 소설에서 목소리를 부여받고 개별 인물로 등장하면서 정지돈의 소설은 다시 한번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그들의 꿈을 독자 앞에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으로 치환해낸다. 그들은 마치 그 찬란한 꿈이 손에 잡힐 만큼 가까이 있다는 듯 말하기도 하고(“미래에는 모든 게 수륙양용이 되고, 우주와 상공, 해저와 지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예술과 기술, 학문 간 경계, 국경, 사유재산이 사라지고”(「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76-77쪽)) 언제나 자신의 작업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그들은 부르주아적인 쓰레기를 만들고 나는 혁명적인 쓰레기를 만들고 있습니다.”(「주말」, 143쪽)).



2. 현재의 미래와 꿈-헛됨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모두 오늘날에 와서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김원은 미래학 세미나에서 서기 2000년 한국은 주 4일만 일하는 곳이 될 것이다, (..) 라고 했는데 지금 한국은 어떤가요, 주 4일 근무인가요, 라고 물었고 나는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최고 수준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81쪽) “그때나 지금이나 해양생물들은 변한 게 없는데 그의 작업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 그는 바닷속에서 뭘 한 걸까, 열정이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으며 우리는 (..)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에 시간을 쏟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바다의 왕은 장 팽르베」,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44-45쪽) 이러한 부분들은 결국 미래에 대한 과거의 확신과 꿈이 오늘날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늘이 된 ‘미래’가 과거의 꿈-희망과 불화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소설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헛됨으로서의 꿈, 꿈-헛됨이다. “장이 말했다. 21세기는 허무의 시대다. (..) 그는 진정한 이상주의자만이 진정한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창백한 말」, 75쪽)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래가 싫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들의 미래지 우리 미래가 아니요, 그들의 진보지 우리 진보가 아닙니다,”(「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70쪽)라는 인물의 말은 그런 맥락에서 ‘그것은 그들의 꿈이지 우리 꿈이 아니’라는 목소리로도 들린다.



  이러한 희망과 헛됨 사이의 모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앞에 인물들은 환멸을 느낀다. “저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곤 합니다, 왜 미래학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한국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다르고 한국관과 한국관을 만든 사람들이 이토록 다르며 만박과 만박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다른 것이지요,”(같은 책, 79쪽)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같은 책, 81쪽) 그리하여 이 불화하는 두 개의 미래 앞에 인물들은 시대착오자가 되거나(“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금목걸이를 하고 통 넓은 기지 바지를 입는 90년대 사람으로 90년대에 머무르는 바람에 2010년대 후반에 힙스터가 된 시대착오적인 동시대인이었다.”(?야간 경비원의 일기?, 20쪽)) 시대착오자라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장은 스킨헤드들에게 다시 한 번 나치라고 말했다. 장을 보는 알료샤와 미주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 장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나치.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창백한 말」, 92쪽)).



3. 문학의 미래



  시대의 꿈에 대한 정지돈의 시선은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이르러 과거의 문학적 꿈에 대한 것으로 옮아간다. 선술한 바와 같이 정지돈의 소설이 그 자체로 시대와 꿈에 대한 작업임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자연스럽다. 과거의 예술운동은 특정한 시대가 꿨던 꿈이라는 점에서 정지돈의 소설 속에 그 자체로 꿈-희망의 상징으로 곧잘 나타나는데, 이는 대표적으로 ?야간 경비원의 일기?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발견된다. “이제 아무도 상황주의를 읽지 않는다면 상황주의는 왜 존재했던 걸까. (..) 상황주의를 알 필요가 있나?”(83쪽) “이제 아무도” 읽지 않게 된 과거의 예술운동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는 냉소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떠한 유의 탄식 같다.



  그 언젠가 사람들이 문학을 통해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시대에 꿨을 법한, 문학의 꿈이라 할 만한 것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자신이 참여하는 독서 모임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화자는 다음과 같이 그 독서 모임을 소개한다. “시인의 말에 의하면 이 독서 모임은 일반적인 독서 모임(..)이 아니라 잊혀지고 숨겨진 한국 문학의 걸작을 읽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한 모임이라고 했다.”(19-20쪽) 그리고는 곧바로 모임의 리더를 시대착오자로 묘사하며 그의 꿈-희망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문학에 관한 전언을 허공에 난사하는 식이었다고 스스로는 믿었던 것 같은데 실상은 닳고 닳은 수사를 목소리 깔고 반복하는 데 불과했다.”(20쪽)



  이후 내용이 전개될수록 화자는 점점 더 그 모임에 반감을 갖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의 문학적 꿈과 그것의 헛됨이 드러난다. 꿈-헛됨을 발견하는 작업이 다시 한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 말을 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게 문제라고, 무식해서 용감할 수 있던 시절은 끝났다고 했다. 술 마시고 여자들에게 집적대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겠지만 말이다”(59쪽) 화자는 “옛날 사람들”이 문학의 미래를 꿈꾸던 시대를 “무식해서 용감할 수 있던 시절”로 일축하며 그들이 꿨던 꿈이 헛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정작 그들에겐 그 꿈을 이룰 능력조차 없었음을 폭로하듯 말한다.



  화자의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문학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연결된다. “문학이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인 수수께끼에 대한 물음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 그러면 나는 왜 글을 쓸까?”(43쪽)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이 소설 전반에 은은하게 베여 있다. 과거에 그들이 꿈꾸던 문학과 오늘의 문학은 얼마나 다른지, 그들의 문학(관)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화자는 생각한다. 그러다가는 이렇게 말해보기도 한다. “문학은 지금보다 더 세속화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문학은 이미지는 아름다워지고 접근성은 세속화되는 식이다, 반대가 되어야 한다,”(35쪽)



4. 문학의 새로운 꿈, 부산물들, 폐허 위에서 꿈꾸기



  이제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정지돈의 소설은 모든 희망을 부정하며 다만 좌절과 절망만을 보여주는 작업인 듯하나, 과연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작업이 겉으로는 허무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꿈의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 치열하게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고 할 만하다. 만약 어떠한 실패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패배주의에 빠진 포기자이기보다 차라리 그 실패를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이리라.



  그렇게 본다면 앞서 살펴본 정지돈의 소설들은 사실상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한 시도, 또는 그 꿈을 꾸는 작업 자체인 셈이 된다. 과거의 꿈-헛됨을 다루는 그의 소설들이 오히려 새로운 꿈에 대한 적극적인 작업으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지돈은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로 여전히 허구와 사실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 가운데서 ‘미래의 소설’을 쓰려고 하고 있다.”라고 쓰고 있는 노태훈의 정지돈 읽기 역시 어느 정도 이 글의 논지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정지돈 소설의 작업적 방향이 미래를 가리키고 있음을 인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미래의 소설”이라는 표현은 정지돈의 소설이 미래를 주제로 삼는다는 뜻일 수도 있겠으나, 그의 소설이 ‘미래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맥락상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러니까 정지돈의 소설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또한 그 자체로 문학의 미래에 대한 꿈꾸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보자. 정지돈은 등단 이후 시대의 꿈과 더불어 문학의 미래에 대해서도 꾸준히 이야기해왔다고, 그리고 그는 지금도 문학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고 말이다.



  현재의 꿈-헛됨과 과거의 꿈-희망을 교차시켜 보여주는 과정을 지나, 이제 정지돈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문학의 미래에 대해 말하려는 듯하다. 지난 4월에 출간된 그의 짧은 소설집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에서 새로운 문학에 대한 그의 탐구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기엔 자신의 서평집에 대한 서평을 쓰게 된 서평가에게 나르시시즘과 시대에 관한 궤변을 늘어놓으며 “서평집에 대한 서평은 순환의 화룡점정”(「어느 서평가의 최후」, 29쪽)이라고 말하는 영화평론가가 있고, 윤리를 고민하면서도 완벽히 사실이자 완벽히 허구인 소설을 쓰려는 소설가가 있다(「이 작품은 허구이며 사실과 유사한 지명이나 상황은 우연의 일치임을 밝힌다」). 이런 소설들을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미래를 꿈꾸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로 보면 어떨까. 자기계발서를 쓰는 수필가의 기묘한 성공을 다룬 소설 「당신 인생의 자기계발」이나 기존에 없던 영화평론으로 순식간에 문화적 아이콘이 된 인물이 나오는 소설 「그리고 세상은 영화가 되었다」의 경우도 그러한 흥미로운 부산물의 일종이다. 이 부산물들은 곧 새로운 문학이라는 주산물이 정지돈에 의해 활발히 꿈꾸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나아가 정지돈은 그의 작업을 따라 읽는 이들에게 자신의 꿈꾸기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그 요청은 그러나 계도적인 것도, 원론적인 것도 아니다. 소설에서 그것은 차라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건조하고 서늘한 독백의 형태로 제시된다. “지금보다 나빠지진 않겠지, 라는 기대. 이게 엄청난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야. 나빠지지 않는 게 가장 힘든 일이야. (..) 나빠지지 않으려면 미친 듯이 좋아져야 해. 그러면 겨우 나빠지지 않을 수 있지.”(?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110쪽) 이는 결코 이상주의나 낙관주의로의 호명이 아니며, 오히려 더욱 철저히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다. 다시 말해 바로 여기의 현실, 과거의 꿈이 헛된 것이었음을 인지하는 지금-여기에 대한 감각 위야말로 우리가 가까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라고 말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이는 정지돈의 소설에서 또 한 가지의 꿈꾸기 방식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 할 만한 것이 된다. 앞으로 더욱 깊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겠으나, 아쉬운 대로 이 새로운 꿈꾸기 방식에 투박하게나마 ‘폐허 위에서 꿈꾸기’라는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결국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지나간 시대의 모든 낡은 꿈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다짐하는 명료한 하나의 목소리를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듣는다.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웃기진 않았다. 과거는 아름답지만 되돌릴 수 없다. 음악도 재킷도 이젠 내게 어울리지 않으니까.”(「기이한 삼각관계」,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89-90쪽) 정지돈이 꿈꾸는 문학의 미래가 여전히 기다려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과거는 아름답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계속해서 “미친 듯이 좋아져” 보기로 하자. 그리고 그렇게 다시 한번 (문학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다. “내가 소설에 몰입한 사이, 날은 밝아 있었다.”(「미래의 책」,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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