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만들어진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장르는, 20세기 중반부터 발행되고 있는 만화책을 원작으로 제작되고 있다. 현대의 영웅 서사극인 히어로 영화는 어느새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특히 지난 10년간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수십 편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강세를 보인다. 2008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MCU 프로젝트는 히어로 영화계에서 ‘어벤저스’를 위시한 10년이 넘는 독주 시대를 열었다. 2024년 현재, 이 MCU는 관객들이 피로감을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러 한풀 꺾인 모양새다. 더욱이 모기업 디즈니(Disney)사의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20년 동안 제작된 여러 마블 코믹스 원작 영화들을 MCU에 편입시켰다.
이 혼란스러운 시점에 기적적으로 제작된 영화가 바로 <데드풀과 울버린>이다. 이 영화는 2016년 <데드풀>로 실사화된 캐릭터인 ‘데드풀’과 2000년부터 실사화된 <엑스맨> 시리즈의 주인공 ‘울버린’의 버디 무비다. 주연인 라이언 레이놀즈(데드풀扮)과 휴 잭맨(울버린扮)은 20년의 시차를 넘어 같은 얼굴로 같은 배역에 분한다. 원작 판권 소재나 배역, 제작 시기 등, 사소한 것 하나라도 틀어졌다면 함께 할 수 없었던 두 캐릭터가 만났다. 시리즈의 팬들에게는 선물 같은 행운이다. 운 좋게 제작된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두 영웅의 이야기를 그린다.
불행과 행운
그 사이
극의 주동자인 ‘데드풀’, 본명 ‘웨이드 윌슨’은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연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 했으나, 말기 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암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그는 악인의 실험에 자원했다. 그 결과 얻은 재생 능력이 암세포의 전이를 막아주었지만, 그 때문에 웨이드가 바라던 평범한 삶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웨이드는 흉측한 외모를 가면으로 가린 ‘데드풀’이 되었다. 이런 암울한 서사와 별개로, 데드풀은 무척 밝은 인물이다. 동료와 적들에게 쉴새 없이 농담을 던지며,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풍자와 해학을 잃지 않는다. 특히 데드풀은 ‘제4의 벽’을 넘어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데, 이런 유머와 독특한 설정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캐릭터이다. 이 영화에서 데드풀은 이미 몇 년 전 퇴장한 캐릭터 ‘울버린’을 되살린다. 사실 다른 평행우주의 울버린을 찾아낸 것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은퇴를 발표했던 영원한 ‘울버린’, 배우 ‘휴 잭맨’이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왔으니까.
이야기에 합류한 ‘울버린’, 본명 ‘로건’은 남성미를 뽐내는 듯한 거친 외모,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영웅이다. 로건은 데드풀과 달리 선천적인 재생 능력 보유자다. 얼핏 축복받은 능력의 소유자인 것 같지만, 그는 ‘불사의 저주’를 받은 상이군인에 가깝다. 청년과 중년 사이에 멈춘 외모와 다르게, 그는 몇백 년 살아오며, 수많은 전투를 겪은 백전노장이다. 오랜 삶의 흐름 속, 소중한 연인과 동료를 떠나보내기도 했으며, 근현대 전쟁사의 비극을 몸소 겪었다. 몸은 회복되어도 정신이 회복되지 않기에, 울버린은 상처 입은 영혼을 지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소중한 이들을 잃고 낙담해있던 울버린은, 데드풀에게 휘말려 극에 동참한다.
이처럼 두 인물은 불행과 행운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웅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우화적 영웅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권하기 어려운 선혈의 액션 시퀸스가 가득하기도 하다.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교훈적 권선징악보다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거침없는 입담과 액션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 잔인한 포장지 속에는 ‘행운’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영화가 전하는 속뜻을 튀기는 살점과 핏방울을 헤쳐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행운을 찾는
가장 불행한 영웅들
사실 이 영화는 진입 장벽이 높은 ‘팬무비’적 특징을 보인다. 20년을 훌쩍 넘은 시간 동안 등장했던 여러 인물이 카메오로 등장하는데, 관련 영화를 사전에 모두 챙겨보지 않았다면 고개를 갸웃할 장면들도 여럿 있다. 그러나 주요 서사는 히어로 영화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두 인물의 조우, 오해와 갈등, 세계의 위기,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종말을 막기 위한 희생과 성공. 복잡한 영화 외적 상황과 영화상 설정들을 뒤로하면, 이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바로 평범한 일상이다.
두 주인공은 극단적인 신체 재생 능력을 바탕으로 어떤 물리적 공격에도 회복하는 불로불사의 영웅이다. 총알과 칼날, 심지어 폭탄으로도 그들을 죽일 수 없다. 온갖 불행 속에서 천재일우 행운으로 불로불사의 몸을 가진 영웅이 꿈은 평범한 일상이라니. 사람들이 너무나 쉬이 가진 것들이 이들에게는 더없는 ‘행운’인 것이다. 데드풀은 흑막이 제시한 ‘시공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직책을 걷어차고, 그가 비관하던 따분하고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울버린을 찾는다.
영화는 행운을 갈망하는 불행한 두 인물이 행운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이 여정은 그들이 여러 행운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선사한다. 우연히 죽을 위기를 넘기고, 힘이 되는 동료를 얻고, 어쩌다 보니 세상을 구할 단 한 가지 해결책에 가까워진다. 종반부, 여느 영웅 이야기가 그러하듯,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두 영웅은 실낱같은 희망 속 극악한 확률을 뚫고 세상을 구한다. 행운이다. 데드풀은 결국 갈망하던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고, 그는 평범함을 잃었던 울버린과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나누며 극을 마무리한다.
“Let's F--king Go”
행운을 향하거나, 떠나며.
불행과 행운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남들에게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쉼 없는 액션과 농담이 가득하지만, 유혈이 낭자하고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정신없는 영화는 내게 행운에 대한 명확한 두 가지 생각을 남겼다.
하나, 행운을 얻기 위해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은 “행운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행운을 바라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불굴의 두 주인공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Let’s f--king go.”, 욕설을 빼면 “좋아 한 번 가보자.“ 정도로 의역된다. 이 짧은 문장이 행운을 맞기 위한 삶의 태도를 함축하는 것 같다. 행운은 길가에 널린 돌멩이가 아니다. 긴 길을 거닐다 만나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희소한 이정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수주대토(守株待兔)하며 작은 행운을 염원하고, 순간에 멈추기를 자처한다. 반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멈출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영웅’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은 물리적으로 포기하지 않는(어쩌면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도 총에 맞으면 아프고, 칼날에 베이면 쓰리다. 하지만 육신이 끊임없이 재생되어 회복하기에 그들은 투쟁을 멈출 수 없고, 단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멈추지 않은 영웅들은 세상을 구했다. 죽지 않는 두 영웅이 나직이 읊는 “Let’s f--king go.”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일지도 모른다. 범인(凡人)인 필자가 멈추지 않는다면,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둘, 행운의 순간을 쉬이 체감할 수 없다. 극의 바깥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은 등장인물의 서사를 유추할 수 있다. 인물의 고난이나 역경을 보고, 관객은 이후에 발생할 인물의 위기나 행운을 짐작한다. 그러나 극 안의 인물들은 어떨까. 당장 눈앞에 포탄이 쏟아지고 있는데 곧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을까? 삶이라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앞으로 누리지 못할 행운을 누리고 있을지, 바로 한 걸음 앞에 내가 상상도 못 했던 행운이 기다리는지, 아니면 지금이 짧은 행복이 행운의 산물인지, 주인공인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행운을 손 놓고 기다릴 수 없다. 그저 시간이라는 극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나의 일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불행한 이들의 사투, 어쩌면 행운이 가득한 이야기 <데드풀과 울버린>를 보았다. 삶의 행운을 향해 나아가는 법을 고민하고, 이미 지나간 소중한 행운을 되짚어보는 순간을 가졌다. 글을 정리하며 우리 모두의 지나간 행운에 멋진 작별을, 그리고 언젠가 살다가 만날 또 다른 행운에 미리 인사를 전한다. “Let's F--king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