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하일 교수 - 경영학과 경영학전공
21세기 금융은 기존 금융기관 중심에서 벗어나 플랫폼 기반으로 진화하고 있다. 모바일,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핀테크(FinTech)가 금융 혁신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세계 주요 도시는 핀테크 허브로 자리매김했으며, 우리나라도 서울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와 디지털 금융 수용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핀테크 산업의 성장률은 글로벌 평균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이른바 ‘코리안 핀테크 패러독스’다.
실제로 국내 핀테크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은 약 7% 수준으로, 세계 평균 14%에 비해 낮다. 이는 규제, 자본, 인프라, 인재, 글로벌 전략 등 구조적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며, 질적 도약을 위한 근본적인 재설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첫째, 규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의 금융 규제는 ‘허용된 것만 가능한’ 포지티브 방식으로 운영돼 왔다. 이는 금융 안정성에는 기여했지만, 변화 속도가 중요한 핀테크 산업에는 족쇄로 작용해 왔다. 금융규제 샌드박스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려는 노력으로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특례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핀테크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규제 자체의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단순한 네거티브 방식 전환을 넘어, 규제 당국이 ‘게이트키퍼’에서 ‘혁신 파트너’로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핀테크 기업이 새로운 사업 모델을 제안할 경우, 기존 규제와 상충되지 않으면 샌드박스를 거치지 않고 즉시 추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실무자 간 메신저를 통한 실시간 소통도 활성화돼 있다. 이는 규제가 혁신의 장애물이 아닌,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대표 사례다.
둘째, 데이터 인프라의 전략적 활용이 관건이다. 한국은 이미 마이데이터 사업을 통해 금융결제 데이터를 개방하고, ‘D-테스트베드’를 통해 핀테크 기업의 실험을 지원하는 등 인프라 기반은 상당히 마련돼 있다. 예컨대 2024년 하반기에는 우리은행, 신한카드, 금융보안원 등과의 협업 프로젝트가 운영되며 실질적 성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프라가 산업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점은 아쉽다. 실제로 국내 핀테크는 여전히 간편결제 등 지급결제 분야에 편중되어 있으며, 인슈어테크, 자산관리, B2B 금융 등 고부가가치 영역의 발전은 미미하다. 이는 단순히 인프라가 있다고 해서 혁신이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데이터 제공자들의 보수적인 태도, 인재 부족, 투자 쏠림 현상 등이 원인이다.
따라서 D-테스트베드나 마이데이터 정책은 단순한 데이터 개방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산업 수요 기반의 실증 프로젝트를 집중 지원해야 한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분야를 중심으로 전략적 인센티브를 설계하고, 혁신 기업들이 시장에 빠르게 안착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셋째, 인재 양성과 협업 생태계 구축이 중요하다. 핀테크는 기술 산업이지만, 기술을 구현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현재 국내 대학과 산업 현장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하며, 실무형 인재 양성 체계도 미흡하다. 서울핀테크랩, 코스콤 핀테크센터 등 인큐베이팅 기관은 존재하지만, 교육과 산업의 유기적 연결고리는 약하다.
싱가포르는 MAS와 폴리텍 대학이 협약을 맺고, 핀테크 특화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처럼 정부 주도의 산학협력 모델은 국내에도 시사점을 준다. 우리대학도 핀테크 기업과 공동 프로젝트, 산학연계 연구, 인턴십 프로그램을 넘어 마이크로디그리(Micro-degree)와 같은 실질적 교육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기존 금융사와 스타트업 간 협력도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진화해야 한다. KB금융과 센드버드의 협업은 그 좋은 예이다. 단순한 투자에 그치지 않고, 테스트베드 제공, 해외 진출 지원 등 실질적인 동반 성장을 이뤘다. 정부는 이런 성공 사례를 확산하기 위해 공동 R&D 및 PoC(기술검증) 중심의 민간 컨소시엄에 정책적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핀테크는 기술로 시작되지만 사람을 위한 금융으로 완성된다. 지금은 양적 확장을 넘어 질적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규제, 인프라, 인재, 자금, 협업, 글로벌 전략이 유기적으로 작동해야 비로소 생태계가 완성된다. 기술과 제도의 혁신, 사람과 자본의 연대가 어우러질 때, 한국은 핀테크 변방에서 벗어나 디지털 금융의 선도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