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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되짚어보기
강진희, 유미환 ㅣ 기사 승인 2019-03-11 01  |  613호 ㅣ 조회수 : 2018



한국 영화 100년의 기록







  100년 전 한국의 첫 영화가 탄생했다. 오늘날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 장르로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으며 한국 영화는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 시장에서도 입지를 다지고 있다. 지금은 크게 성장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던 한국 영화사, 그 100년 발자취를 살펴보자.


 



일제 강점기 속 피어난 한국 영화



  1919년 10월 27일 조선에서 최초의 조선인 제작 영화 〈의리적 구토〉가 무대에 올랐다. 10월 27일 영화의 날은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것을 기념해 제정됐다. 당시 국내에는 영화 관련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이 맡았다. 전 스태프가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작품은 1924년 개봉한 〈장화홍련전〉이다. 당시 이틀 연장 상영할 만큼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지만, 한국인 제작진만의 기술로 제작된 장화홍련전은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 비평가들은 배우의 미숙한 연기, 의문스러운 상황 설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1935년, 조선 최초 발성 영화 〈춘향전〉이 제작됐다. 이전에는 소리가 없는 무성영화에 변사의 목소리를 빌어 영화를 상영하는 형태였다. 장화홍련전과 마찬가지로 춘향전엔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최초의 발성영화라는 점이 높은 의의를 지닌다. 1939년에 접어들며 근대소설의 영화화가 가속화됐다. 정비석 원작의 『성황당』, 이광수 원작의 『무정』 등이 그 예이다. 어린이 연속극도 영화화됐다. 〈똘똘이의 모험〉은 KBS라디오의 어린이 연속극을 극영화로 제작한 것으로 1946년 개봉됐다. 해방 후 최초의 극영화라는 의의가 있다.


 



전쟁 후 한국 영화의 부활, 그리고 침체





  해방과 전쟁 후 1950년대의 사회는 본격적인 근대화, 민주화를 향해 움직였고 한국 영화는 그 움직임을 담았다. 1956년 작 〈자유부인〉은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유부녀의 탈선과 성 개방이라는 이야기를 끌어내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국 멜로드라마의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한국영화계에서 멜로드라마 붐이 일어나는 요인이 됐다. 1960년대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다.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은 한국 영화계가 정치적, 사회적 진통을 겪으며 역량을 키우도록 도왔다. 사극, 스릴러 액션, 문예 등 다양한 장르 영화가 등장했다. 영화 〈오발탄〉은 다양한 카메라 기법으로 부패한 자유당 정권 말기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담아내 당시의 혼란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1961년 일차 개봉됐지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영화의 상영이 금지됐고 이후 1963년 재상영됐다.


 



  1970년대 한국 영화는 불황기에 들어선다. 외국영화의 수입과 TV 보급, 유신체제가 주원인이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발전을 모색했다. 컬러영화와 동시녹음 기술이 도입되고 신인 감독들은 다양한 기법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신인 감독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은 청년영화를 대표한다. 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한 삶 등 상실감과 비애를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실제 대학생들의 생생한 연기가 호응을 얻었으나 다섯 차례의 검열을 통해 데모 장면 등이 잘려나갔다. 1979년 개봉한 〈심봤다〉는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순수 국내 기술력만으로 전편 완전 동시녹음을 이뤄냈다. 이 작품은 산삼을 둘러싼 심마니들의 물욕과 인간성 상실을 토속적 사실주의로 그려낸다. 한편 한국 영화는 1980년대에 들어서며 더욱 침체했다. 독재정권이 영화의 정치, 사상적 표현을 검열했고 한국 영화 산업에서는 에로 영화가 주를 이뤄 관객들은 한국 영화를 외면했다. 1987년 민주화를 맞이하며 이념적으로 자유로워지자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9년 개봉한 〈오! 꿈의 나라〉는 학생영화인들이 제작 집단을 결성해 만든 첫 장편 독립영화다. 미국에 대한 정치적 성찰과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을 통해 비판적 사실주의 영화의 계보를 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영화 산업의 재편, 성장하는 한국 영화



  1990년대는 영화 산업 전체가 재편되는 시기다. 영화 전문 프로듀서와 멀티플렉스, 블록버스터 영화의 등장, 대자본의 영화 투자는 한국 영화가 장르적, 기술적으로 발달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99년 개봉해 한국 영화사상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세운 〈쉬리〉는 CG와 미니어처를 활용한 액션 연출과 멜로 요소를 배합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2000년대에 이르러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넘기는 한국 영화가 탄생한다. 〈실미도〉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 〈괴물〉 등 연달아 천만 관객의 기록이 세워졌다. 또한 한국 영화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임권택 감독은 그의 2002년 작 〈취화선〉으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고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2003년 작 〈올드보이〉는 일본에 역수출되며 국내 영화 산업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시장 규모가 잠시 줄어들었지만, 독립영화의 약진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돌이켜 본 한국영화는 잠시 주춤할 때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발전을 모색했다. 그 결과 2006년 2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영화 수출액은 2016년 4천만 달러를 넘어섰다. 앞으로도 한국영화가 그 작품성을 더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 영화의 이모저모



  한국 영화가 100년을 맞이할 때까지 역사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한국 영화의 숨겨진 진실들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자.


 



  한국 영화의 시작은 조선시대부터였다. 그렇다면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최초의 영화관은 어디였을까? 바로 ‘단성사’다. 단성사는 1907년에 최초로 민간인들이 설립한 실내 극장이다. 일제강점기 단성사에서는 무대예술 공연을 비롯해 영화 제작 및 배급 그리고 상영까지 이뤄졌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외국 영화도 상영했다. 단성사가 한국 영화에서 중요한 이유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인 〈의리적 구토〉를 제작하고 상영했기 때문이다. 또한 단성사는 일제강점기 흥행작 〈아리랑〉을 상영하고,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을 개봉하면서 신기술 도입에 따른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소개했다. 이렇듯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으로서 단성사는 우리나라 영화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로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이다. 이 작품은 희곡 ‘맹진사댁경사’를 각색해 만든 작품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진출하면서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 출품하는 쾌거를 이룬 작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상은 실패했다. 뒤이어 진출한 작품인 강대진 감독의 〈마부〉는 1961년 제 1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는 한국 영화 중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받은 상이다. 〈마부〉는 1960년대 우리나라의 시대상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서민적 리얼리즘 영화 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둠으로써 한국 영화가 세계무대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화 촬영기사는 누구였을까? 바로 ‘이필우’다.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던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는 한국인이 연출 및 제작을 하긴 했지만 촬영은 일본인이 했었다. 이필우는 최초로 이기세 감독의 〈지기〉를 촬영한 기사로 유명하다. 오사카에 있는 영화 촬영소에서 촬영과 현상기법을 배워 영화를 찍었다. 또한, 그는 동생 이명우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성 영화를 개발한 공로자이다. 변사가 흉내낼 수 없는 다듬이 소리나 물소리 등을 생생하게 구현할 수 있었고 변사의 목소리에만 익숙했던 과거와는 달리 배우가 직접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그는 한국 영화 제작에 획기적 영향을 미쳤다.


 



단성사와 한국영화상영 100주년 방문기





  기자는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을 다녀왔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단성사와 한국영화상영 100주년’ 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다. 로비에서부터 진행된 이 전시는 단성사가 지어진 이후부터의 연대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단성사가 지어진 1907년부터 시작해 순서대로 소개돼 있었다. 또한, 단성사에서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사용했던 홍보 리플렛들과 입장권 및 포스터를 볼 수 있어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영화를 관람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한국 영화의 시작인 단성사를 만나보고 싶다면 한번쯤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아가보길 추천한다. 한국 영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 영화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1층에 위치한 전시로 단성사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 단성사의 입장권에 자리마다 다른 도장이 찍혀있는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단성사의 입장료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오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단성사에서 상영된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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