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인회계사, 세무사를 비롯한 전문직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2023년도 공인회계사(CPA) 1차 시험 지원자 수는 1만 5,940명으로 전년 대비 3.4% 증가했으며 2019년도 응시자 수가 9,677명이었던 것을 고려했을 때 불과 4년 만에 약 64% 증가라는 비약적인 상승률을 보였다. 세무사 시험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2022년도 세무사 1차 시험 응시자 수는 1만 4,708명으로 2018년도 1만 438명이 응시한 것과 비교해 4년 만에 응시자 수가 약 41% 상승했다.
사법고시 폐지 이후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로스쿨에 진학할 수 있는 법학적성시험 일명 ‘Leet’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Leet의 2024학년도 지원자 수는 1만 7,360명으로 지난해 1만 4,620명에 비해 18.74% 증가했다. Leet의 지원자 수는 2017학년도부터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학령인구는 감소하고 있음에도 2018학년도부터 7년 연속 지원자 수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문직 열풍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해 볼 만하다.
시들해진
공무원의 인기, 왜?
반면 안정적인 직장의 대명사이자 이른바 ‘신의 직장’이라는 명성으로 이름을 떨치며 취업 준비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공무원의 인기는 나날이 감소하고 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올해 9급 국가직 공무원 공채 경쟁률은 22.8대 1을 기록했으며, 불과 10여 년 전인 2011년도에는 경쟁률이 93.3대 1을 기록했음을 감안했을 때 전문직 시험과는 달리 경쟁률이 매년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사혁신처는 이와 같이 공채 경쟁률이 하락하는 원인으로 고교선택과목 폐지와 청년층 인구의 감소 등을 꼽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경험해 본 청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과거 안정적이고 상대적으로 낮은 근무 강도 등의 장점으로 ‘신의 직장’으로 불린 공무원이 현직 및 퇴직자에 의해 ‘신의 직장’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돼 경쟁률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행정연구원이 현직 공무원 6,17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직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나는 기회가 된다면 이직할 의향이 있다’는 문항에 ‘그렇다’ 또는 ‘매우 그렇다’고 답한 공무원은 46.2%를 차지했다. 이직 희망 사유 1순위로는 ▲낮은 보수(58.5%) ▲과다한 업무(12.9%) ▲승진적체(5.3%) 등의 사유가 줄을 이었다. 실제로 청년층의 공무원 면직 사례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SNS 상에서 면직자들이 면직을 결심하게 된 사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 및 게시물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학에도 부는
전문직 열풍
전문직 열풍은 대학생들에게도 불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학가에 비대면 강의가 시작되며 재학 중에 수능을 다시 보는 이른바 ‘반수’ 현상이 심화되면서 상위권 대학에 재학 중인 자연계열 학생들의 경우 의대, 치대, 한의대 등 졸업 후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반수를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실제로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2022년 서울대 자퇴생은 328명, 연세대 자퇴생은 656명, 고려대 자퇴생은 750명으로 3개 대학 모두 자퇴생의 수와 비율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전문직 열풍은 비단 자연계열 학생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등을 비롯한 일부 대학은 인문계열 전문직 합격자를 다수 배출하고자 공인회계사 및 세무사 등의 전문직 시험 응시자를 지원해 주는 일명 ‘고시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사법고시 폐지 이후 늘어나는 로스쿨 수요에 대비해 Leet 대비반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문직,
사회의 불확실성이
만들어낸 선택
좁아지는 취업문도 전문직 열풍을 확산시킨 요인 중 하나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전국 4년제 대학 재학생 및 졸업(예정)자 3,224명을 대상으로 2023년 대학생 취업 인식도를 실시한 결과 올해 대학생들의 졸업생 예상 취업률은 절반에 못 미치는 49.7%일 것으로 전망됐다. 대학생이 꼽은 취업 준비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는 ‘경력직 선호 등에 다른 신입 채용 기회 감소’가 26.3%로 가장 높았다. 또한 올해 적극적 구직자 중 서류 전형 합격 횟수는 평균 1.7회, 합격률은 28.3%로 작년보다 7.5%p 낮은 수준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다수의 대기업이 공개채용을 폐지하고 수시 채용으로 채용 시스템을 변경하는 취업 시장의 흐름으로 인해 취업문이 더 좁아진 상황이다. 이렇게 어려운 취업환경을 뚫고 취업했을 때의 임금 수준이나 근로조건이 전문직보다 좋지 않기 때문에 전문직 시험에 뛰어드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전문직의 임금 수준은 다른 직업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OECD가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의사 연평균 소득은 노동자의 평균 소득의 2.1~6.8배 수준이었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의 노동자 평균 임금과의 격차는 우리나라가 다른 OECD 국가보다 유독 컸다.
다른 전문직의 평균연봉도 ▲변호사 7,770만원 ▲세무사 6,750만원 ▲변리사 6,508만원으로 조사 대상 전체의 직업 평균연봉인 4,072만원과 비교하면 높은 수준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직업 선택 시 가장 크게 고려하는 요소는 5점 척도 기준 경제적 보상(4.14점)이 가장 높은 점수의 응답을 보였고 고용안정(4.04점)이 그 뒤를 따랐다. 이런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정년이 없고 소득이 높다는 전문직의 장점이 직업을 선택할 때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 직장 전문직,
그 현실은?
한편, 본지는 전문직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알아보고자 최근 청년 세대에서 각광받고 있는 전문직 중 하나인 의사로 재직 중인 A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81학번으로 입학해 88년도에 졸업 후 35년째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재활의학과를 전공했고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근무 중입니다.
Q. 진로를 의사로 결정하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A. 학창 시절에 사람을 살리고 싶다거나 국가 의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그런 거창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대입을 할 당시 제 성적이 의대에 입학할 점수가 됐고 의사라는 직업이 크게 싫지 않아서 의대에 지원해 의사가 됐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 주위 의사분들 대부분이 그런 케이스에 해당하는 거 같아요.
Q. 많은 사람들이 의사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직에 계신 분으로서 전문직 또는 의사에 대한 만족도가 궁금합니다.
A. 상당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졸업할 때 읽은 제네바 선언에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항목이 있는데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처한 위치에 따라 직업윤리에 충실할 수 있으며 나름 소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소득도 꽤 높은 편이라 금전적인 부분에서 만족감이 크죠. 그리고 내가 원할 때 그만둘 수 있고 이직도 쉽게 되는 편이라서 이 부분도 일반 직장인들과 비교했을 때 큰 메리트인 거 같아요. 따로 정년도 없어서 정년에 대한 압박도 없죠.
의사 생활을 하면서 윤리 의식이 제고됐던 것도 좋았던 거 같아요. 진료를 하면서 환자분이 처음 왔을 때보다 점차 호전되는 걸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환자분을 얼른 낫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죠.
Q. 최근 많은 사람들이 회계사, 세무사, 의사 등을 비롯한 전문직이 되고자 하는 전문직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지금같이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변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전문직 열풍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생각해요. 우선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득하기 어려운 만큼 사회적으로도 대우해 주고, 여러 메리트도 있고, 미래도 어떻게 보면 보장되는 편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전문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해보라고 말을 하고 싶어요.
전문직 열풍,
우려의 목소리
인터뷰를 통해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현직자의 직업 만족도는 실제로도 높은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전문직 열풍이 점차 확산되며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는 인력은 늘어나지만, 합격자 수는 한정돼 있어 사회는 유능한 인력들을 놓치게 된다. 또한 전문직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험 준비에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도 합격하지 못하면 피해는 개인의 몫으로 돌아간다.
인력 수급 불균형도 심각한 문제다. 전문직 선호 현상이 나타나며 로스쿨로 우수한 인문계열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교육 현장에서는 인재 쏠림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계열 상위권 학생들은 의대로 쏠리면서 과학•기술 인재 확보를 어렵게 한다. 또한 전문직 열풍은 입시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사교육 심화를 초래한다. 의대에 합격하기 위해서 초등학생이 의대 준비반에 들어가는가 하면 의대에 입학하기 위해 직장까지 퇴사하고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들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생이나 학부모의 불안을 이용한 사교육이 늘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의대뿐 아니라 로스쿨도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련 사교육이 성행하고 있다. 로스쿨 입학에 필요한 Leet 시험 대비부터 시작해서 면접 준비, 자기소개서까지 수백만 원이 넘는 학원비가 필요하다. 로스쿨 입학 후에도 선행학습과 변호사 시험 대비를 위한 사교육은 계속된다. 전문직 열풍으로 인해 이미 과열된 사교육 시장이 더욱 성행하는 것이다.
사회의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전문직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해 보이고 영원할 것 같은 상황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상황이나 조건이 바뀌면 현재의 합리적 선택이 비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의종 서울이코노미포럼의 대표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사실을 현실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높은 쪽을 깎아 낮은 쪽과 균형을 맞추는 하향 평준화는 삼가야 한다”며 “의대를 가든 공대를 가든 경영대를 가든 공정한 기회, 상응한 대우가 보장되면 인력 쏠림은 저절로 해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문직 열풍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동 시장의 환경 개선과 사회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기업, 정부 등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으로 개개인의 적성, 흥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직업 선택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남건우 기자
김서진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