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기기의 보급이 보편화하면서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쓰는 경우보다 노트북,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를 이용해 글을 쓰는 경우가 늘었다. 현대인은 손글씨보다 자판을 두드리는 일에 익숙해졌다. 삶은 편리해졌지만, 사람들의 필체는 갈수록 엉망이다. ‘천재는 악필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글씨체가 삶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논술고사, 입사시험, 국가고시 등 손글씨로 치르는 중요한 시험을 앞둔 취업준비생(이하 취준생)이나 수험생들은 다르다. 글씨체로 자신의 첫인상이 판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씨체도 스펙이다’라는 말처럼 글씨체 교정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악필 취준생이나 수험생의 고민은 더 크다. 포털 취업 카페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악필인데도 필기에 통과하신 분 계신가요?”,“글씨가 별로라고 채점도 안 하고 그러진 않겠죠?”와 같은 게시물들이 글씨체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이에 따라 글씨교정학원의 인기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이다. 학원 수강생들의 30~40%가 대부분 행정·임용고시, 변호사·노무사 등 논술형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나 취준생이다. 최근 오뚜기, 산업은행 등의 기업은 지원자가 온라인으로 자기소개서 내용을 복사·붙여넣기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지원자에게 자필 자기소개서를 요구한다. 이렇게 자필 자기소개서를 원하는 기업이 증가할수록 취준생들의 글씨체에 대한 민감도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다. 답안지나 자기소개서를 펼쳐두고 평가한다면 그중 깔끔한 글씨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글씨체도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읽기 좋은 글씨체는 면접관에게 좋은 첫인상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경쟁력이기 때문에 이들은 글씨체 교정을 통해 또 하나의 스펙을 쌓는다.
한편 각 기업은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을 담은 개성 넘치는 서체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들은 서체 개발을 통해 소비자에게 기업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는 이른바 ‘서체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손글씨가 사라진 인터넷·모바일 시대에 서체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서체 마케팅을 시도한 기업은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인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주)우아한 형제들이다. 이들은 2012년 ‘한나체’를 처음 공개하고 2019년 최근까지 8가지의 폰트를 무료로 공개했다. 개인뿐만이 아닌 다른 기업·지자체에서도 (주)우아한 형제들의 폰트를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최근에는 무료 서체를 만들어 공개하는 것이 일종의 사회공헌, 문화마케팅으로도 여겨진다. 게임 산업 회사인 넷마블 측은 기업 대표 캐릭터인 ‘ㅋㅋ(크크)’를 서체화해 ‘넷마블체’를 선보였다. 넷마블 측은 “서체는 기업 정체성을 고객들에게 친근하게 전달하고자 문화적 소통 도구로서 개발됐다”라며 한글날을 맞아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넷마블체’를 무료 배포했다. 또 GS 칼텍스는 과거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GS의 기업 정신을 알리겠다는 취지로 지난 2월부터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한 ‘독립 서체’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어 GS 측은 2, 3월에는 독립운동가인 한용운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글씨체를, 4월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서체를 무료로 공개했다. 이 글씨체들은 실제로 해당 인물의 글씨체를 복원해 서체화 한 것이다.
글씨 유튜버 ‘NAIN 나인’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선언서를 자필로 작성해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이 영상은 조회 수 15만 회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유명한 시나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을 통해 글씨 쓰기의 매력을 전하고 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글씨 쓰는 걸 보면서 위로받는다”, “글씨체가 상용화되면 사용하고 싶다”, “글씨 잘 쓰는 방법도 알고 싶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유튜버 NAIN 나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악필을 교정하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유튜버 NAIN 나인이 소개하는 악필 교정법 첫 번째는 선을 반듯하게 긋는 것이다. 직선으로 이뤄진 한글에서 ▲선이 울퉁불퉁하거나 ▲반듯하게 그어져야 하는 선의 끝부분이 위·아래로 향하면 글씨체가 일정하지 않게 느껴진다. 줄 노트를 사용해 반듯한 선 긋기 연습을 추천한다. 두 번째, 동그라미를 최대한 동글하게 쓴다. 자주 사용하는 자음인 ‘ㅇ’을 일정한 크기로 쓰는 법을 연습해 글씨체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세 번째는 글씨의 크기를 맞춰 쓴다. 처음엔 그리드, 줄 노트에 가득 차게 글씨를 크게 쓰면서 자음과 모음의 간격을 신경 쓰도록 한다.
앞서 취업 준비를 위해 글씨교정 열풍이라는 내용을 소개했다. 이와 관련해 본지는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A 글씨교정학원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학원 측은 “최근 취업난 때문에 취업준비생과 직장인이 학원을 많이 찾는다”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기술사 시험을 준비하는 직장인이 특히 늘었다”라고 글씨교정 열풍의 이유를 설명했다. 악필을 가진 사람의 습관에 관한 질문에 “악필은 습관보단 조급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소 글쓰기를 하지 않던 사람이 시험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적다 보니 흘려 적게 되는 것”이라며 꾸준한 연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펜을 잡는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원 측은 “많은 양의 글씨 쓰는 것이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된 펜 잡는 방법으로 손이 아프거나 쥐가 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 줄을 다 작성하고 다음 줄로 이동하면서 펜을 잡는 방법이 변하는데, 이때 글씨체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했다. 따라서 단정한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조급해지지 않기 위해 평소에 연습해야 하고 펜을 잡는 방법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기자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못 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비뚤배뚤 적어간 알림장을 부모님이 해석하느라 애쓰셨고, 수업 시간에 열심히 받아 적은 필기 노트는 가끔 기자 본인도 헷갈릴 때가 종종 있었다. 중학생 때는 조회 시간과 자습 시간에 펜글씨 교본을 통해 글씨 연습시켰지만, 반복해서 하는 일에 쉽게 싫증을 느꼈고 글씨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어느덧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기자는 ‘글씨체가 취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겠다’라는 걱정과 함께 악필 교정에 도전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글을 써야 하는 서술형 시험에 맞춰서 글씨 쓰는 시간도 함께 측정했다. 연습할 글씨체는 문체부 쓰기 정체, 글의 내용은 애국가로 했다.
원고지를 총 5장을 인쇄했다. 2장은 애국가를 옅은 회색으로 작성해 그 위를 덧씌워가며 연습했고, 나머지 3장은 한 줄씩 여백을 두고 뽑아 윗줄의 글씨체를 보고 아랫줄에 따라 썼다. 앞서 소개한 ▲반듯한 직선 ▲‘ㅇ’ ▲자음과 모음의 간격 ▲글자 획을 신경 쓰면서 글씨를 작성했다. ‘천천히 작성하면 쉽겠지’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첫 장의 1절 가사를 다 쓰기도 전에 손이 저릿했다. 뒷장으로 갈수록 글씨가 망가지는 것을 걸 더욱 신경 쓰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 글씨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옛 악습관을 반복했다. 한 장을 다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첫 장은 10분 11초, 마지막 장은 7분 34초가 소요됐다. 반복해서 쓰다 보니 몇 개 자음은 손에 익어 자연스럽게 써졌지만, 모음의 직선은 비뚤배뚤하게 쓰는 경우가 있어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기자의 글씨체는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글씨 유튜버 ‘NAIN 나인’의 방법처럼, 몇 가지를 신경 써서 작성해보니 이전보다 깔끔해진 글씨체를 볼 수 있었다. 기자는 받아쓰는 글의 내용을 애국가로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시, 가사, 책을 인용하면 재밌는 글씨체 연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시험 기간에는 전공 서적의 내용을 인쇄해 글씨체 연습을 하면 좋은 학점과 글씨체 모두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체험한 악필 교정 이외에도 다양한 손글씨 관련 공모전이 있어 소개한다. 첫 번째는 ‘네이버 한글날 손글씨 공모전’이다. ‘당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손글씨를 찾습니다’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공모전은 한글날을 기념해 진행된다. 양식에 맞춰 자신의 글씨체 256자를 작성하고 그에 대한 사연을 제출한다. 그중 109점을 선정해 첨단 AI기술로 11,172자의 글씨체를 만든다.
다음은 전라북도에서 진행하는 ‘2019 한글로 하나되다’ 행사 중 ‘우리말 사투리 손글씨 공모전’이다. 특색 있는 지역 사투리를 손글씨로 작성해 접수하면 된다. 선정된 작품은 전라북도 도지사상 등으로 시상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한글날을 맞이해 글씨체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참여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