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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실패한 사랑을 유기하는 데 실패하는 두 편의 시
성기원 ㅣ 기사 승인 2022-12-06 09  |  668호 ㅣ 조회수 : 470

실패한 사랑을 유기하는 데 실패하는 두 편의 시



 일찍이 플라톤이 미메시스, 즉 이데아에 대한 모방의 차원으로 설명한 바와 같이 특정한 형식을 매개하고 영감의 원형에 편집과 가공을 더하는 성질 탓에 예술은 자주 불완전하며 일정 부분 실패를 전제한다고 여겨진다.



 실패는 작품으로 가공되지 않은 삶의 차원에서도 쉽게 벌어진다. 예컨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기호는 기의와 기표로 분리되어 있다. 이 본질과 표현의 불일치는 매번 크고 작은 갈등을 만든다. 서로에게 낯선 우리의 소통을 지탱하는 관행과 문법 따위는 일시적인 약속과 위태로운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불안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 있어 ‘실패의 형식’이라는 말은 아주 익숙하게, 심지어는 당연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시가 실패하기까지 계속 떠돌고 있는 시도들이 있다. 실패를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는 욕망들이 있다. 아직도 실패를 알지 못하는 허황된 구애들이 있다. 시를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시와 함께하려 해서는 안 된다. 너무 강력한 시도들이 시를 무너지게 한다. 하려는 말들이 시를 실패하게 한다. 이렇게 시는 실패한다. 이것은 또한 시를 쓰려는 자의 실패다. 쓰려는 자가 없어야 시가 된다. 쓰려는 자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시는 쓰이지 않는다. 그의 실패가 확연해졌을 때 시가 온다.



 실제로 많은 시인이 자신의 시론을 전개할 때 실패의 경험과 그 의미를 고백한다. 이때 실패 자체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실패를 수식하는 “끝없”음과 그 주변을 “계속 떠돌고 있는 시도들”이다. 그러니까 시, 나아가 문학과 예술이 아름답고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예정된 실패를 알면서도 부딪치기를 포기하지 않은 용기와 노력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택과 조작을 거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모방이 지식과 유희를 주는 적극적인 활동이자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요인이라고 풀이했다. 그렇다면 창작 과정의 수두룩한 실패 역시 예술을 모방된 작품에 그치게 만드는 한계가 아니라 예술을 예술로, 삶에 가까운 행위와 실천으로 만드는 조건일지 모른다.



 예술 이전의 삶에 있어 사랑은 또 얼마나 커다란 행위이자 어려운 실천인가. 시는 사랑에 닿으려 수많은 실패를 반복해왔다. 박소란과 정다연 두 시인이 보여주는 실패도 사랑에 관한다.



(1) 산에 한그루 나무를 심었다



비좁은 화분에 듬쑥한 잎이며 가지를 거머안고 신음하던/ 나무//



언젠가 깊이 좋아한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것인데



내게서 시들어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것인데//



이제 산에서 쑥쑥 자라렴 화분 같은 건 잊고//



누군가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자 웃으며 그는/ 유기(遺棄)로군, 말했다//



유기로군, 나는 웃지 않았다



 (1)의 ‘나’는 “깊이 좋아한 사람”으로부터 나무 화분을 선물 받는다. 건넨 이는 ‘화분’을 주었지만, ‘나’는 ‘나무’를 받은 것 같다. “비좁은 화분”에는 “깊이” 뿌리내릴 자리가 없기에 ‘나’는 자신의 사랑이 “화분 같은 건 잊고” 자랄 수 있도록 나무를 산에 옮겨 심는다. 그 행위가 유기와 같다는 말에 ‘나’가 웃지 않은 건 그것이 농담이 아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웃지 않았을 뿐더러 웃지 ‘못’했을 테다. 유기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음을, 그러고도 자신에게 여전히 유기에 실패한 마음이 남아있음을 알기 때문에.



(2) 네가 뒤따라온다//



나는 허리께까지 자란 들풀을 헤쳐 길을 만든다 소매에 풀물이 든다 나의 발끝에선 풀이 꺾이고, 꽃잎이 터지고, 언덕이 미끄러진다 너의 발끝에선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언덕이 일어선다//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널 버리겠다 널 버리겠다는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무는 순식간에 벌목되었다가 다시 자라 내가 걷는 모든 걸음을 지켜본다 혹독한 증인처럼 뒤를 돌면 어느새 너는 내 발밑에서 죽어버린 것을 죄다 그러모아 품에 안고 있다 숨을 불어 넣고 있다



 (2)의 유기는 보다 가까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걸음마다 죽음이 깃들고 마음을 품기만 해도 나무를 벌목하게 되는 ‘나’는 ‘너’를 위해 유기를 결심한다. ‘나’의 바람대로 버려진 ‘너’는 “다시 자라”난다. 하지만 이내 (2)의 유기도 ‘나’의 의도를 벗어난다. ‘너’는 일어선 자리에 머물지 않고 “혹독한 증인처럼” ‘나’를 “뒤따라”간다. ‘나’는 도망칠 “길을 만”들려 하지만 그럴수록 “소매에 풀물이” 들어 증거를 남기게 될 뿐이다. 아무리 실패한 사랑이라 해도 마음을 버리는 일이 우스울 리가, 쉬울 리가 없다. 그건 “불편하다”.



(1) 산을 떠올렸다



나무를 품은 비옥한 흙과 바람과 햇살 같은 따스한



그 산의 모든 것들//



(…)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깊이 좋아한다는 것은//



막무가내로 엉긴 생각의 뿌리가 풀리지 않았다



(2) 나는 오늘 반드시 너를 잊을 것이고 결코 네가 날 앞서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노을이 지고 있다 나는 혼자 돌아갈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플래시로 비추고 비추면서, 네가 뒤따라오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네가 어떤 생각에 불을 지필지 추측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뼈대만 남은 극장 앞에, 몰락한 사거리에, 황폐해진 펄 중심에 데려간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넌 여기니 여기까지니 묻고 그러면 나는 다시 걷고 걸어 사람이 떠난 마을로, 더는 열매를 맺지 않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로 널 데려간다//



걸음을 멈추면 멈출 때마다



나는 널 버리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두 시의 주체는 실패한 사랑을 유기하는 데조차 실패한 자신을 발견하고 남은 마음을 들여다본다. (1), “모든 것”을 떠올리려 애쓰면서 산을 “흙과 바람과 햇살”로 쪼개보고 질문하고 질문하며. (2), 또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입장에서 (“너는 여기니 여기까지니 묻고”) “뼈대만 남은 극장”, “몰락한 사거리”, “황폐해진 펄”, “더는 열매를 맺지 않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 등 불가능한 알리바이의 장소를 계속 찾아 나서며. 이들은 무언가 유기할 때 자신도 대상으로부터 유기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곁을 떠나더라도 사랑이 지속되기를 바란 것 역시 자신이 아닌가. 착수부터 어긋났으므로 복기의 시도 역시 예정된 실패를 향한다. 무중의 마음속에 뿌리는 “풀리지 않”고, 중요한 증거는 “새까맣게 잊”힌다.



(1) 산에 올랐다/ 나무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나무는 보이지 않고, 산에는 나무가 너무 많아/ 이토록 많은 나무는 누구의 소행일까//



썩어 비틀어진 등걸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산의 부름을 받는 일이 남았다



(2) 다시 걸으면/ 여기니 여기까지니 묻는 너의 목소리가 자꾸 날 앞지른다



 완전한 유기는 스스로를 버릴 때에나 가능하다. 그러니 주체는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도 움직이기를, 버려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으므로. (1)의 주체는 다시 “나무를 찾아” “산에” 오르고, (2)의 주체는 “다시 걸”으며 도주를 재개한다. 여전히 사랑하므로. “주저앉”게 되더라도 “부름”을 기다리면서, ‘너’가 날 “앞지”르더라도 “다시 걸으면”서.



 사랑의 착수와 복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랑은 사활을 가르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지는 쪽이 있다 해도 그건 대결 구도를 만드는 쪽일 테고, 반대로 이기는 쪽은 경기장을 벗어나는 쪽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승패가 없을지언정 실패는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실패야말로 사랑을 사랑으로 만드는 조건이라고 말해보자. 사랑은 “허황된 구애”로 실패의 주변을 영원히 떠돈다. 시가 그러하듯이.



 두 시에서 사랑의 대상은 구체적인 인물 대신 불특정 객체로 그려진다. 이때 버려지는 객체들이 동물에 비해 유기라는 표현과 잘 결합하지 않는 식물에 가까이 그려진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 모습이 빛과 숨처럼 온화한 성질로만 묘사되지 않고 자라고 뒤따르고 앞지르는 동적인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들은 시에서 유기遺棄되어도 유기有機성을 잃지 않는다.



 시의 핵심 원리인 비유를 경유해 이를 의인화로 읽기 쉽지만, 사랑은 비인간존재에게도 가능하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는 강력한 방식으로도. 식물도 유기체도 ‘생명’의 일종이라 여전히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진다면 사랑의 ‘대상’이 아닌, 비유를 걷어낸 사랑 그 자체를 응시해보자. 그동안 우리는 사랑을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으로만, 시혜적인 태도로 다루지 않았는지, 유기된 객체의 ―손을 내민다거나 말을 건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유기적 존재를 몰라보지 않았는지.



 한때 예술가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사랑에는 결말이란 게 없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결말을 원해서 스스로 매듭을 짓더라도 매듭은 매듭일 뿐. 매듭 다음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 자신했는데

이름을 듣는 순간 그대로 풀려버리는



 이제 실패까지도 다른 비인간존재인 사물의 이름으로 불러보자. 그리하여 ‘실패는 실을 감는 도구’라는 농담을 빌린다면, 사랑은 실패에서 풀려나는 긴 실과 같다. 그 가느다란 사랑은 이따금 실패를 초과하는 데 성공하기에 시에 앞선다. 시인은 사랑을 겨우 붙잡고 의지할 매듭을 지어볼 따름이다. 실패 앞에 너무나 쉽게 풀리고 말지라도, 막을 수 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매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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