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관념까지 청춘의 시선으로 거닐기
-심보선, 김수연의 시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
오늘 날에는 청춘에 대한 고민을 끝마친 것처럼 세간에서 청춘을 부르는 말은 ‘청춘을 즐겨라’, ‘불안한 청춘들’처럼 젊은 세대를 총칭하는 상투적인 표현처럼 사용되고 있다. sns의 청춘을 보면 청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청춘의 밝은 면만을 동경하며 자신에게 놓인 청춘을 거부하고 ‘청춘’을 이행하려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삶에서 즐겁고 거창한 면을 재단해, 이것이 ‘청춘’이다 라고 믿고, 말하는 것 말이다. 청춘을 살아가는 우리는 청춘을 정의할 수 없다. 던져진 야구공의 속력을 구하는 것은 이동거리/시간이듯이, 우리가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는 청춘을 지나며 고민하고, 청춘이 어느 정도 흐르고 청춘의 길에서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의 과정을 지난 문학작품의 청춘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양적 측면의 ‘청춘’이 아닌,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둘러싼 청춘에 대해 고심한다. 필자는 청춘이 묻어나오는 시 2편을 통해, 일상에서 관념까지 청춘의 시선으로 거닐어 보려고 한다.
2) 심보선,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내려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키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를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말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심보선, 「청춘」(전문),『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 지성사, 2008, p.107.
심보선 시인의 시는 관념의 세계를 현실의 자리와 연결한다. 시가 비가시적인 것을 호명하는 일이라면, 심보선의 시는 가시적인 세계를 통해 비가시적인 세계를 포착해낸다. 심보선의 <청춘> 역시 관념어인 청춘을 현실의 장면을 불러와, 아주 적법한 언어를 통해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현실을 장면을 그대로 끌고 들어오고 있기에, 화자의 발화를 따라 시를 쭉 따라가면 시에서 시인을 통해 화자가 감각하는 청춘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이 화자를 통해 발화하고 있지만, 시인이 거의 화자가 되어 발화하는 듯하다. 시인과 화자가 동일시 되어 읽히는 이유는 시 전체의 한 문장 한 장면이 <청춘>으로 향하는 하나의 비유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등장하는 장면의 일관성은, 자신이 세계보다 앞질러 있다는 감각에 있다는 것이다. “한 귀로 말하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갔을 때” 등 청춘 속의 화자는 자신이 세계보다 앞질러 있다는 감각 그리고 세계보다 앞지를 수 있다는 감각(“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으로 발화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화자의 도발적 태도와는 다르게, 화자는 시 속에서 번번이 현실과 마주한 장면을 배치하고 있다. 결국 아버지의 멱살을 쥔 손을 놓게 되거나, “그 그림자를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같은 문장을 통해, 청춘을 회상하며 청춘만의 치기 어린 풍경을 시 속으로 불러온다. 치기 어린 풍경은 시 속 이미지의 연계를 통해 확장된다. 시의 중반부, 우유를 마시고 잠에 들어 꿈의 길이가 길어진다는 문장과, 가로등의 여러 갈래의 그림자 거느리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는 문장은, 길어지는 꿈과 그림자가 밤의 시어로 작동하여, 문장이 나열된 시임에도 리듬을 갖추게 한다. 혹자는 심보선의 <청춘>을 읽고, 잘 풀리지 않은 어두운 청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보선의 <청춘>은 어두운 청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잘 풀리지 않은 것이 어두운 청춘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위악’적인 태도의 화자가 마치 세계를 향해 덤벼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시의 후반부, 시의 화자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같은 문장을 통해 화자 역시 세계보다 자신이 앞지른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세계 속으로 파고들고 싶은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심보선의 <청춘>은 어두운 청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것이 없는 청춘의 자신감, 처음 마주하는 세계에 대한 도전을 이야기하면서도, 안정되지 않아 상처받고 불안한 청춘의 모습을 청춘이라 부르고 있다.
3) 일상 속의 청춘
늦여름 호두 서리
살다 살다
학교에서 교복 입고 나무를 다 타고.
발아래 재촉하는 놈들에게
서걱거리는 호두를 쥐어준다.
호두가 이렇게 사과처럼 열려?
빗자루 손잡이로 치니 물이 튀며 부서진다.
호두를 사과에서 꺼내 발라낸다.
알던 모양의 호두가 보인다.
그걸 깬다.
더럽게 안 깨진다.
손톱 아래가 갈라질 것 같다.
먹으면 죽는 거 아냐?
5월에 농약치던데.
가루나 다름없는 수확물을 입에 넣는다.
쓰다. 예상한 맛이 예상한 대로 부서진다.
먹어서는 안 죽는데 걸리면 죽어.
지갑에는 집 갈 버스비가 남아 있다.
지갑 옆에 자리 잡은 호두가 덜그럭거린다.
자전거를 끌고 등교한 놈이 버스 정류장을 지나친다.
김수연, 「늦여름 호두 서리」, 『열아홉 레시피』, 민음사, 2018, pp. 35~36.
김수연의 <늦여름 호두 서리>는 2018년 대산 청소년 문학상 수상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흔히 청춘의 초입이라 부르는 고등학교 2학년의 시는, 시 속에서 풋풋한 청춘의 느낌이 묻어나온다. 간단한 붓칠을 하듯 간결한 언어로 시적 상황 툭툭 그려내는 힘은 <늦여름 호두 서리>라는 제목에 걸맞게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위태로운 느낌과 늦여름 뜨겁지만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여유 속 일탈에서 오는 긴장감 있는 호흡을 잘 구현하고 있다. 시 속에서 화자는 늦여름 친구들과 일탈을 주도한 학생으로, 호두 서리를 하며 일상의 간단한, 그러나 호두 서리라는 낯선 장면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일상의 장면을 더욱 시적으로 만드는 것은, 호두 서리를 하며 주고받는 친구들과의 질문에 대답이다. 친구들은 서리하는 것이 걸릴까 두려운지, 계속해서 화자에게 재촉하고 질문을 던진다. 먹으면 죽는 거 아냐냐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질문에 화자는 이렇게 답한다. “먹어서는 안 죽는데 걸리면 죽어” 장난기 어리고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 뱉는 대사는, 가능과 불가능의 세계를 건너다니는 장난끼 넘치는 느낌을 준다. 시의 마지막까지도 이런 장난스러운 태도가 묻어 있다. 화자가 호두 서리를 마치고 집에 갈 버스비와 서리한 호두가 덜그덕거리는 것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버스비와 사소한 일탈과 장난의 세계의 충동의 상징인 호두와 나란히 놓여, 마치 더욱 장난을 치고 놀고 싶어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런 충동을 배치한 후, 자전거를 끌고 온 놈이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게 만들며, 화자는 아마 시가 끝난 뒤에도 장난과 놀이의 느낌이 계속될 거라는 여운을 만든다. 고등학생 2학년이 쓴 <늦여름 호두 서리>는 청춘의 도입부에서 시작되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일탈 충동을 일상 속에서 흔히 장난처럼 하는 서리를 통해 전개 시킨다. 시 속에서 청춘이라는 말은 일절 등장하지 않지만, 고등학생으로서 시인 자신이 쥘 수 있는 크기의 언어로 정교하게 작성된 <늦여름 호두 서리>는 시인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쓴 청춘이 태동하는 지점을 읽어낼 수 있다.
4) 마치며
두 편의 시는 각각 청춘을 회고하는 시점과 청춘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작성되었다. 두 시의 공통점은 청춘을 지나는 두 화자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향해 도발적이고도, 위악적이고, 장난스러운 태도를 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세계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단계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한 발씩 내딛어 보기도 하고, 또 완전히 무너지기도 하며 자신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청춘의 한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두 편의 시로 청춘의 일상과 관념을 오가며 청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단순히 삶에서 젊고 즐거운 면을 때어다가 ‘청춘’이라 칭하는 목소리에 휘둘리는 것보다 청춘(靑春) 푸른 봄날에 피어나는 줄기처럼, 무엇이 될지 몰라 불안하고, 또 두근거리는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시기가 청춘이라고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