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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작)비평_삼가 故 청춘의 명복을 빕니다. -성혜와 미래-
김주윤 ㅣ 기사 승인 2023-12-08 14  |  683호 ㅣ 조회수 : 224

(삼가 故 청춘의 명복을 빕니다. -성혜와 미래-)



한국의 청춘들은 죽었다. 아니 죽임당했다는 말이 더 맞겠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이 사전적 의미라면 진작에 죽은 것이 맞다. 생명력을 틔워내기도 전에 싹부터 자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고로 이 글은 청년 말살에 도취된 이 나라의 실상을 ‘고발’하는 일종의 ‘도발’이다. 우울감 충만한 이 시대 K-청년들의 단상을 두 편의 독립 영화를 통해 살펴보자.




(누가 성혜의 선택에 돌을 던지랴)



2020년 개봉한 영화 ‘성혜의 나라’는 시종일관 흑백의 세상을 담아낸다. 번듯한 대학을 졸업했으나 지난한 취업 실패로 N년 째 반지하 월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성혜. 영화적 장치라고 한들 그녀의 무미한 삶을 조명하기에 색깔은 사치였나보다. 어두운 원룸에 갇힌 채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성혜의 오늘은 남 일이 아니다. 그녀를 찾아오는 아픈 상황들은 지극히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더 아프다.



“불법이니 뭐니 그래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천지삐까리인 걸 뭐!” 영화 속 임대업자가 뱉는 한 줄의 대사는 청년 주거의 잔혹한 실태를 돌아보게 한다. 현실이 그렇다. 한국일보의 대학가 전수조사 결과 전체 원룸 건물의 82%는 이른바 ‘불법 쪼개기’를 하고 있었다. 4가구 전용 주택을 임의로 개조해 3-40개의 원룸으로 만들어 파는 방식이다. 법정 주차장 건립 의무 따위 사뿐히 위반하고 그마저도 악착같이 원룸으로 개조하는 각고의 노력도 엿보인다.



주거 기본법 상 1인 가구의 최저 주거기준은 14제곱미터이지만, 제아무리 법적 권리라고 한들 청년들은 자격이 없다. 쪼개고 쪼개 최저 기준조차 미달인 3평짜리 방에 1,000만 원의 보증금을 불러도 감내하려는 이들이 넘친다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공공임대주택 보급과 기숙사 건립, 건축법 위반 건물 단속 심화를 통해 해결하면 될 일 아니냐고? 성혜가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다. 지난 2020년 한양대 사례를 보자. 수요 폭증에 해당 지역구 의원이 나서 기숙사 신축을 발표했으나, 투지를 불태운 임대업자들의 성난 목소리에 ‘하루 만에’ 공약은 철회됐다. 건축법 위반 심사 또한 마찬가지다. 당국은 ‘심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으니 문제가 해결될 리가 있나. 하긴 작년 반지하 침수 사태를 겪은 서울시만 봐도 그렇다. 침수 취약 지구를 지정하라는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무얼 하나. 행여나 땅값 떨어질까 눈에 불을 킨 채로 위협하는 이들 탓에 아직 그 어느 구도 취약 지구를 지정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성혜의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딘가 구린내 나는 이유들로 취업에 ‘꾸준히’ 실패했다. 여자라서. 나이가 많아서. 인상이 쎄해서. 내정자가 있어서. 성혜의 능력은, 아니 성혜가 쌓아 올린 삶의 궤적은 우스운 이유들 앞에서 소용이 없었다. 결국 사회를 향한 성혜의 불신은 확신으로 차오르고,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택한다. SBS 뉴스의 보도를 보면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20대 청년들은 지난 5월 사상 최고치인 35만 명을 돌파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부모 등골 빼먹는 기생충’, ‘나라에 도움 되지 않는 암적 존재’라며 손가락질한다. 글쎄다. 비생산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당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법조차도 평등하지 않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성혜는 구직을 단념한 채 ‘혼자만의 연금’을 만든다. 부모님의 사망 사고 합의금으로 받은 거액을 매달 150만 원씩 40년간 받는 셀프 연금 상품에 가입한다. 고로 성혜는 행운아의 케이스에 속한다. 현실은 어떠한가. 정부의 대책없는 연금 개혁 시도 앞에 ‘내가 과연 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청년층을 잠식했다. 되려 연금을 해지하는 청년들의 비율이 높아졌다고 하니 청년들에 한해서는 실패한 정책임이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간단하다. 소극적인 태도와 대화의 부재. 지금의 연금개혁 안을 보라, 모수 개혁에만 매몰됐다. 뼈대는 그대로 두고, 숫자놀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태도다. 모수적 방법은 모집단과 모수가 명확할 때 주효하다. 인구 소멸 속도와 노인 인구의 수가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어떤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대응 가능한 비 모수적 옵션 또한 함께 준비해야 하지 않나. 소극적인 것이 신중하며 섬세하기에 그런 것이라면 고려할 여지가 있으나 한국은 그것도 아니었다. 인구 소멸 속도에 따라 지급액과 연금 잔고가 철저하게 조절되는 ‘자동조절장치’를 만든 일본과 달리, 한국 재정위원회가 만든 18개의 개혁 옵션에는 자동조절장치가 그 어디에도 전무했다. 이리 부실한 개혁안이니 연금이라는 사회적 시스템 앞에서 청년들의 속내가 불신으로 채워지는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와 전문성의 부족도 문제다. 연금개혁의 경우, 사회 보장의 성격을 가지므로 구성원들과의 충분한 합의가 필수적이다. 허나 한국일보의 조사에 따르면 연금특위의 사회적 합의 여부에 부정적으로 응답한 비율이 무려 77%였다. 연금개혁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스웨덴이 무려 10년이 넘는 장기적인 합의 끝에 개혁에 성공한 것을 보면, 일방향 소통으로 지극히 자신들만의 편의를 추구한 한국 연금특위의 모습은 더 부끄럽다. 연금 재정 충당에 있어서 부담이 큰 이들은 당연히 청년층이다. 허나 이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공정은 신기루다. 미래 없는 세상)



청춘이 살해당한 궁극적인 이유는 2020년 개봉한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통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영화 속 ‘미래’는 취업 스터디를 운영하며 차곡차곡 스펙을 쌓아가는 평범한 취준생이다. 그러던 중 ‘재원’이 나타난다. 미래의 스터디원으로 함께 하던 재원은 실력도, 의지도 없었지만 늘 자신감 넘쳤다. 아등바등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스터디원들을 향해 조소를 날리듯. 그리고 왜인지 거만했던 재원의 비밀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난다. 이른바 낙하산으로 스터디원들이 선망하던 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으로 말이다.



‘무너진 공정’. 2019년, ‘조국 사태’가 쏘아 올린 공은 한국 사회를 정확히 관통했다. 둘로 쪼개진 진영은 각각 광화문으로, 또 서초동으로 모여 목소리를 높였다. 무너진 공정 앞에 가장 상처받은 이들은 누구였나. 단연 청년들이다. 재원의 편법에 미래가 느껴야 했던 박탈감. 그것은 온전히 청년들의 몫이 되어 스스로를 ‘패잔병’으로 낙인찍게 했다. 여기에 허위 입시 스펙을 “노력으로 얻은 기회”라며 감싼 당시 여당의 태도는 반기득권 정서를 폭발시키는 기폭제였다. 안타깝게도 4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다. 최근 선관위 간부 자녀들이 ‘채점표 조작’을 통해 당당히 입사했다는 비리가 다시금 청년들을 할퀴었다. 토익 학원의 앞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새벽부터 겨울바람을 맞으며 기다리고, 제 부모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자격증 공부에 열을 올리는 이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그것도 국가로부터.



유의해서 봐야 할 장면은 또 있다. 미래를 비롯한 여성 스터디원들이 모여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불신을 쏟아내는 장면을 보자. 혹자는 청년들의 출산 거부를 두고 이기적이고 눈만 높아진 청년들의 실상이란다. 과연 그럴까. 최근 정부가 저출생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세법 개정안만 봐도 저출생의 책임이 비단 청년들에게 있지만은 않음을 볼 수 있다. 실질적 수혜를 입는 이들은 ‘원래 부자였던’ 소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마치 ‘자본 리쇼어링’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대기업들의 법인세를 깎아줬듯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결국 청년들에게만 책임 부담을 떠넘기는 태도가 문제다. 돌봄 공백이 대표적이다. 지속해서 저출생의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정작 정부는 올해 예산 편성안에서 초등 돌봄교실 지원 예산을 삭감했다. 숱하게 주창했던 저출생 문제 해결 의지에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난임부부 지원 예산도 마찬가지다. 낳을 수 있어도 거부하는 이들이 많은 지금, 의지는 있으나 도움이 필요한 경우라면 응당 전폭적 지원이 마땅하다. 헌데 오랜 시간 난임 부부들의 발목을 잡았던 소득 기준 제한은 올해 들어서야 정부 차원의 폐지 방침이 거론됐다. 난임 시술비 건강 보험 적용 횟수 제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폐지 방침이 나오지 않았다. 정부조차 사력을 다하지 않고 있음에도, 청년들에게만 협조를 바라는 건 모순이다. 15년에 걸쳐 280조 원을 들이부었음에도 해결되지 않았다면, 이제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좀 들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죽어버린 청춘들 사이에서는 무력감이 맴돌고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격차를 극복할 수 없다는 무력감. 사회적 시스템의 배신 앞에서 오히려 힘을 얻은 것은 분노보다도 성실한 일상에 대한 회의다. 공생보다는 각자도생이, 정의로운 분노보다는 쓸쓸한 자조가 앞장서는 지금, 우리는 내일을 기대할 동력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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