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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문단비 ㅣ 기사 승인 2016-03-07 00  |  568호 ㅣ 조회수 : 391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올 것만 같은 2월의 끝이었지만, 그 어느 봄도 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 눈은 그칠 줄 몰랐다. 97년 전 이맘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의 겨울 속에서 ‘대한 독립’의 봄을 꿈꾸던 한민족은 일본에게 철저하게 탄압당했다. 그 어떤 독립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일본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삼일절을 맞아 우리 선조의 독립을 향한 열망의 역사, 일본이 자행해온 탄압의 역사를 품고 있는 서대문형무소에 다녀왔다.


  저항의 역사, 서대문형무소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나오는 순간 길게 늘어서 있는 붉은 벽돌의 담장이 눈에 띄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 탓에 미끄러워진 길을 따라 걸으니 곧 입구가 나왔다. 굳게 닫힌 철문 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라 쓰인 입구 옆에는 높은 망루가 하나 있었다. 입구의 다른 부분에 비해 유난히 낡고 색이 바랜 망루는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 드넓은 형무소의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경성감옥에서 두 차례나 확장했으니 당연히 넓을 수밖에 없었다.


  국권침탈이 일어나기 전이던 1908년,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던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잠재우고 한민족의 저항의식을 뿌리 뽑고자 했던 일제는 서대문 현저동에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을 신축했다. 이것이 서대문형무소의 첫 모습이었다. 그 뒤 국권침탈과 3·1 운동을 거치고 수감자가 대폭 증가함에 따라 서대문형무소는 수용인원 3,000여 명 가량의 대규모 형무소가 됐다.






▲  형무소에 수용됐던 5,000여 명의 수형 표를 모아놓은 공간 ©


  드넓은 형무소 내부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역사 전시관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보안과 청사로 쓰였던 건물이지만 현재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품과 전시물이 전시돼 역사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실제로 전시관에서는 형무소의 일제강점기 시절 모습과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안에는 일본 헌병이 사용했던 칼, 형무소로 끌려가는 이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는 용수와 수갑 등이 전시돼 있었다. 천장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전시관 한쪽에서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다. 기자는 잠시 멈춰 수업에 귀를 기울였다. 수업을 듣는 아이들 말고도 전시관 내에는 제법 사람이 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어르신, 그리고 영어 안내문을 열심히 읽던 외국인들까지.


  관람동선을 따라 쭉 이동하다 보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됐던 애국지사의 수형 표를 모아놓은 공간이 나온다. 유관순, 한용운, 여운형 등의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여러 독립투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수형 표는 약 5천여 장이다. 일제강점기 때 실제 수감된 독립운동가가 약 4만 명이라고 하니, 이곳에 보존된 수형 표는 고작 8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립투사들의 얼굴은벽면을 가득 수놓았다. 방 중앙에서는 영상과 함께 선조들을 향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많이 힘드셨죠? 많이 추우셨죠? 많이 배고프셨죠? 많이 무서우셨죠? 많이 외로우셨죠? 많이 그리우셨죠? 많이 걱정하셨죠?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목숨 바쳐 지킨 대한민국이 이렇게 당당하고 크게 자랐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세요”


  사형장 지하의 시신수습실을 재현한 방에는 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사진들을 한창 톺아보고 있을 때, 뒤편에서 강우규 의사의 절명시가 흘러나왔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시를 듣고 있으면 절로 숙연한 기분이 든다.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새로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헌병에게 붙잡혀 이곳에서 이듬해 11월 29일 사형됐다. 강우규 외에도 신간회 창립을 주도한 이낙영, 6·10 만세운동을 지도한 권오설 등의 얼굴을 기억하며 고개를 숙였다.






  탄압의 역사, 일본의 고문


  숨을 내쉬면 입김이 절로 나오는 서대문형무소의 지하는 일제강점기 시절 수감자들을 취조하는 곳으로 사용됐고, 지금도 그 모습을 일부 재현해 취조실과 독방, 임시 구금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취조실은 동지가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취조당하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설계됐다. 지금은 한 방에는 동료의 취조를 듣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그 옆방에는 일본인 경찰이 독립운동가를 강압적으로 취조하는 모습이 재현돼 있었다. 잡혀 온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기 위해 쓰인 도구들도 볼 수 있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상자 안에 수감자를 강제로 들어가게 하고, 한나절 내내 나오지 못하게 했다. 기자가 실제로 들어간 후 상자를 닫았더니 움직일 틈조차 없었다. 발 디딜 공간 역시 아주 좁아서 자세를 바꾸는 것은 꿈도 못 꿀 정도였다. 그 외에도 안쪽에 못을 박아놓고 수감자를 가둬놓았던 상자와 손톱 찌르기 고문을 위한 도구가 있었다. 상자에 박힌 못의 날카로운 끝 부분을 보고 있으면 일제의 만행이 하나 둘 떠올랐다.


  또한, 지하에서는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애국지사의 육성 증언을 들을 수 있다. 故 이규창 지사와 故 이병희 지사 등의 육성 증언은 형무소를 찾은 사람들이 일제가 자행해온 수많은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더욱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한다. “고문이 무서우면 독립운동은 못한다”고 말했던 故 이병희 지사. 그녀는 실제로 항일운동, 노동투쟁 등을 해오며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북경감옥에서 옥사한 이육사의 시신과 그의 작품을 유족에게 전해 이육사의 시가 기억될 수 있게 했다.


  고통의 역사, 당시의 수감자들


  전시관을 나서면 독립투사들이 실제 투옥됐던 옥사가 나온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옥사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수감자들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중앙에 있는 중앙 간수소에서 수감자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부채꼴 모양으로 설계된 감옥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폭력적인 행위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옥중 생활을 하며 겪은 일이 기록돼있다.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사람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 좁은 방 안에 수감자를 몇 명이고 몰아넣고, 작은 틀에 담은 밥을, 게다가 콩과 좁쌀 등을 섞어서 배급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수감자에게 강제 노역을 시킨 일본의 만행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옥사를 나와 격벽장을 지나다가 사형장 앞의 미루나무를 봤다. 미루나무에는 이름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통곡의 미루나무’였다. 나무는 1923년 사형장을 건립할 때 식재됐는데,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이들이 이 나무를 잡고 통곡을 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춥고 바람이 부는 날씨에 나무는 떨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형장으로 향하던 독립투사들 역시 속으로는 떨고 계시지 않았을까.


  사형장을 지나 형무소 모퉁이로 가면 일부를 복원해놓은 시구문을 볼 수 있다. 시구문은 사형을 집행하거나 수감자가 옥중에서 사망했을 때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몰래 반출하던 통로다. 시신에 고문 흔적이 많거나 사형 사실을 은폐해야 할 때 주로 이용됐다. 원래는 약 200m의 길이로 형무소 바깥과 연결된 통로였지만, 해방 직전 시구문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 했던 일본은 시구문을 붕괴시켰다. 지금의 시구문은 지난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된 부분을 복원한 것이다.


  형무소에서 나오니 서서히 눈발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담장 옆의 잔디밭에선 어린아이들이 큼지막한 눈사람을 굴렸다. 손이 얼 것 같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처럼 그 시절의 애국지사들은 살이 헐 것 같은 고통을 참고 독립을 꿈꿔왔다. 과거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흘린 피눈물과 희생으로 이뤄진 독립이지만, 지금까지도 서대문 형무소를 향한 발걸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를 마주할 수 있는 곳, 서대문 형무소를 많은 이들이 다녀갔으면 한다. 


  문단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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