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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사건이 소환한 임꺽정
기사 승인 2021-03-28 14  |  643호 ㅣ 조회수 : 388

LH사건이 소환한 임꺽정



  최근 LH 직원들의 땅투기 혐의가 폭로되면서 그간 토지 개발을 두고 자행되었던 정책관련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연일 매스컴에서는 막중하고도 방대한 관련 수사를 누가 할 것인가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가 하면 ‘경자유전’의 대원칙이 사라진 세태를 한탄하기도 한다. 전근대 한국 사회를 연구하는 필자는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500년 전 조선 시대 황해도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떠올려 본다. 작금의 사태와 놀랍도록 닮아 있는 그곳으로 가보자.



  조선 초기까지 황해도는 땅도 척박하고 인구도 적어 곡식의 생산이 적은 지역이었다. 교통도 불편해서 서해 바닷길로 가면 서울과 가까워 보이지만 뱃길이 순탄치 않았다. 황해도 서쪽 바다를 향해 멸악산맥이 뻗어가다 바다와 맞부딪치면서 복잡한 해저지형을 형성했고 이 때문에 부근 바닷물이 험하게 소용돌이쳐 오가는 배들이 끌려들어가기 일쑤였다. 그곳이 바로 장산곶이며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지척이다.



  조선국가는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았던 남쪽 지방 백성을 황해도와 평안도로 이주시켜 농사짓게 하면서 해당 지역에 맞는 농사기술과 곡식 품종을 개발했다. 이에 황해도는 농업생산과 인구가 늘어 급기야 인구에 비해 토지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황해도가 풍요로워지자 목숨을 걸고 바닷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황해도에서 곡식을 거둔다 해도 비용이 많이 드는 육로로 운반하면 이문이 남지 않기 때문에 유통비용이 적게 드는 바닷길을 반드시 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산곶 바닷길이 열린 배경이다.



  이윽고 권력과 결탁한 자본이 서울과 지척지간이 된 황해도 해안가 땅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본과 인력을 동원하여 버려진 해안가 땅에 뚝을 쌓고 짠물을 빼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옥토가 만들어질 것을 기대했다. 바닷가와 가까워 쌀값이 비싼 서울로 곡식을 옮기기 쉬울 뿐 아니라 조선 정부에서도 자금과 인력 지원, 세제 혜택 더 나아가 소유권까지 인정해주었으니 이른바 공공의 이익을 내세워 사업 참여자들에게 어마어마한 특혜를 준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바램과는 달리 그곳은 빈 땅이 아니었다.



  농지가 부족했던 황해도 농민들은 힘이 되는대로 해안가의 땅을 조금씩 조금씩 개간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여력이 닿지 않는 땅에는 갈대가 무성했는데 이 갈대를 엮어 갓이나 광주리, 삿자리를 만들어 삶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 해안가 땅을 자기땅이라고 선언―현대의 ‘토지수용’―해버리자 원래 살던 원주민은 쫒겨나거나 개간의 노동력으로 징발되었으며 원없이 공짜로 쓸 수 있던 갈대도 이들에게 댓가를 주고 사와야 했다. 대동강 물을 팔아 먹은 봉이 김선달보다 만배는 탐욕스러웠던 자들은 중앙의 고위관직자, 지방의 토호 그리고 누구보다 모범을 보였어야 할 왕자 같은 왕의 식구들이었다. 율곡 이이 선생처럼 영향력 있는 정부의 고위관료 중에서 이같이 탐욕스러운 “개발행위”를 막으려 했던 분도 없지는 않았으나 16세기 중반이 되면 개발의 마수는 황해도 연안을 마무리하고 평안도로 향하고 있었다.



  1559년 황해도 감사 신희복은 “황해도 여러 읍을 두루 살피니 마을이 텅 비어 온종일 걸어도 겨우 초가집 서너채만 보이고 옷가지와 먹을거리를 갖춘 자가 없었다”고 당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의 비참함을 전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 중에는 무력으로 정부에 대항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으니 임꺽정이 그 중 가장 유명하다. 임꺽정 자신은 갈대를 짜다가 몰락한 백정이었으며 점차 그 곁에는 갈 곳 잃은 농민, 수공업자와 거대 권력에게 밉보인 지식인이 모여 들었다. 임꺽정의 항거는 3년 만에 끝났지만 그 뒤로도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투쟁은 이어졌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여전히 공익을 빙자한 개발과 특혜분양 그리고 원주민의 몰락이라는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허덕이고 있다. 장산곶 길이 열리면서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유리되고 하루아침에 생업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들을 아직도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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