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남 초빙교수(전 SBS 보도본부 국장)
날씨가 시나브로 서늘해지니 잠시 태평양의 따뜻한 섬으로 떠나 보는 건 어떨까. 아직은 학기 중이니까 마음속 여행이라도 실컷 해보자. 공짜니까.
쪽빛 바다와 부서지는 파도, 하늘에선 일 년 내내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천혜의 낙원, 하와이다. 그중에서도 마우이섬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화성을 닮았다는 해발 3,000미터 할레아칼라, 실제로 이곳의 분화구에서 화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마션(The Martian 2015)>을 찍었다. 정상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여기가 지구 맞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굳으면서 그대로 말라 펼쳐진 지구의 속살 같은 곳도 볼 수 있다. 이름도 생소한 아히히키나우 국립보호구역이다.
섬 곳곳에서 이런 원시의 지구를 느낄 수 있는 마우이에 지난해 여름 커다란 비극이 닥쳤다. 산불이다. 2023년 8월 8일 발생한 마우이 산불은 옛 하와이 왕국의 고도 라하이나를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불을 피해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로 해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확인된 사망자만 100명, 이재민은 7,000명 넘게 발생했다. 1918년 미네소타 산불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산불 피해로 기록됐다. 세계 최고의 재난 관리 시스템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그것도 사방이 바다(물)인 태평양 한가운데 섬에서 이렇게 큰 산불이 나다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구온난화로 건조해진 산비탈 초목이 문제였다. 때마침 허리케인이 불어닥쳐 화를 키웠다. 라하이나는 지금도 복구커녕 도시를 통제한 채 불탄 잔해 철거작업에 한창이다. 폭격 맞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캐나다에서도 산불로 몸살을 앓았다. 지난해 캐나다에서는 400건을 넘는 크고 작은 산불이 마치 괴물처럼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발생했다. 국제사회가 지원에 나설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해외긴급구호대 151명을 파견했다. 우리 산불진화대가 해외에 파견된 건 처음이다. 미주에서, 유럽에서, 남미에서, 지구촌이 뜨겁다. 갈수록 산불이 커지고 많아진다.
그럼 이런 대형 산불은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 2년 전, 경북 울진에서 발생한 산불은 강원도 삼척까지 확산하며 9박 10일 동안 산과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기록 사상 가장 큰 산불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트라우마에 겪고 있다. 마을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소, 송전 철탑 등 국가 기간 시설을 위협했다. 예전에 없던 현상이다. 작은 건 뉴스에 안 나와서 그렇지, 지난해에만 우리나라에서 595건의 산불이 났다. 피해 면적 100헥타르 이상의 대형 산불도 8건이나 됐다. 과거엔 대개 1년에 한 두 건이었는데 말이다.
산불은 더 이상 산속 일이 아니다. 산이 많은 강원도나 경북에서 많이 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전국 산불 지도를 보면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등 대도시 인근이 시뻘겋게 표시돼 있다. 서둘러 대응해 대형 산불로 커지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대도시 주민들이 산불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다.
산불을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대응해야 한다. 기후변화를 등에 업고 갈수록 진화하는 괴물, 그게 바로 달라진 산불의 정체다. 단지 산림 재난을 넘어 산불을 국가 재난, 나아가 국가 안보의 개념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 지난해 마우이 산불로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한 라하이나. 불탄 차량이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 김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