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은혜 기자(환경·25)
빠른 것을 선호하며 효율성이 중요한 가치가 된 사회에서, 내가 지금까지 많이 들은 말은 “너는 너무 느려”였다. 어떤 노래를 들을지 선택하는 것, 무언가를 이해하고 배우는 것,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내 속도는 항상 느렸다. 타인보다 시간을 더 들여야 했고, 적당한 속도를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속도를 늦추는 요인은 나의 결함과 최선의 밀도 때문이었다. 타인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만큼 나의 부족함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또 어느 정도가 나의 최선인지 계속해서 고민하는 날들이 많았다. 이런 습관이 생긴 것은 중학생 시절 만났던 한 선생님 덕분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교직 생활이 처음인 분이셨다. 학생들 앞에서 붉어진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수업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은 하나의 수업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연습하셨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가장 정확하고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항상 고민하셨던 그 모습은, 내가 매일 듣는 수업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력에 기대어 나온 것임을 느끼게 해줬다. 마치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것처럼,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됐다.
누군가의 시간과 최선, 누군가의 장벽 등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감각은 나에게 있어 예민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 담긴 애씀을 완벽한 타인인 내가 완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나로서 가능한 것은 최선을 다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타인의 최선은 그 자체로도 소중했기에, 나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느렸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나 할 때도 상처 주지 않을 말을 고르느라 망설였다. 관계 속에서 다가가는 속도를 조절하고,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에서 내 진심이 왜곡되지 않고 타인에게 닿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진심을 쏟는 건 내 마음을 상대에게 건네는 것이므로, 상대에게 끊임없이 기대하며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무방비한 연약함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나와 타인의 시선, 놓인 환경이 같을 수 없는 존재, 즉 나로부터 밖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양이와 같이 살면서 가지게 된 생각들이다.
고양이와 나는 언어, 표현,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도 다르며 그 다름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또 내 최선이, 배려가 그대로 고양이에게 닿고 있는지 매 순간 적당한 거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부분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린 당연하게 자신의 시선에 기대어 타인을 대한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용기와 배려가 때론 부담과 차가움으로 다가갈 수 있는 오해는 충분히 존재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과 내가 같을 거라는 오만함으로 아파하고 동시에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나는 ‘나’라는 세계와 ‘너’라는 세계가 충돌할 때, 그 세계를 통합하기보다 타인의 세계에 존재할 무수한 신호들을 궁금해하는 방식을 선택했으므로 부단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느리더라도 끝까지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느린 나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건, 나의 사람들 덕분이었다. 내 속도와 나 자체를 궁금해하는 다정함을 내가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다가와 두드려 줬다. 또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너의 마음이 나에게 닿고 있다고 끊임없는 외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따뜻한 무해함은 의심할 수 없이 명확해서 나 자체로 발 디딜 수 있는, 내가 있을 곳이 돼 줬다. 느리더라도 고민하고 쏟아부은 시간의 가치와 의미는 충분하므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자신의 속도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가 자라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른 느린 사람들에게 나 역시 무해한 사람이 되자는 마음이 건조해지지 않기를, 나의 무해함이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최은영 작가의 소설 속 문구로 글을 마치고 싶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자신의 속도를 긍정하고 방어적이지 않기를, 그래서 ‘너’의 세계가 온전하게 공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